영주-봉화, 하나의 미래를 꿈꾸다 - 지방소멸 위기 속 행정통합 해법을 찾아서
영주와 봉화는 더 이상 따로 설 수 없는 공동운명체다. 인구감소와 고령화, 청년 유출은 두 지역 모두를 흔드는 현실이 됐다. 생활은 이미 하나지만 행정은 둘로 나뉘어 중복과 비효율을 낳고 있다. 본지는 7부작 기획보도를 통해 ▲국내외 통합사례 ▲주민 목소리 ▲정체성 과제 ▲정책적 제언을 종합해 영주·봉화 통합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싣는 순서>
[1] 영주와 봉화, 생활은 하나인데 왜 행정은 둘인가
[2] 마창진 통합 15년, 남긴 성과와 남은 과제
[3] 핀란드의 선택, 주민이 만든 통합 도시
[4] 덴마크, 국가가 만든 지방행정의 미래
[5] 주민은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우려하는가
[6] 정체성을 지키는 통합, 가능할까
[7] 영주·봉화 통합, 실행을 위한 제언
“봉화 이름이 사라질까 두렵다”… 통합의 가장 깊은 불안
균형 없는 통합은 또 다른 중앙집권-역할을 다시 나누는 일
하나는 행정, 둘은 문화 - 정체성을 살린 통합의 설계
통합의 첫 조건은 존중과 신뢰, 지도보다 마음을 먼저 합쳐야
“통합이 되면 봉화 이름은 어디로 갑니까”
봉화읍 시장에서 30년째 상점을 운영해 온 한 주민이 던진 말이다. 그는 가끔씩 통합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봉화가 사라질까’ 하는 불안부터 앞선다고 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근본적 고민을 함축한다. ‘행정은 하나로 묶을 수 있어도, 지역의 기억과 정체성은 합쳐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 이름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봉화는 오랜 세월 산림과 생태, 청정 이미지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춘양목, 봉화은어·송이축제는 봉화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주민에게 ‘봉화’란 단순한 행정명칭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존심 그 자체다.
봉화 주민 김 모 씨(68)는 “이름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삶의 증거”라며 “이름이 사라지면 봉화의 역사도 함께 지워진다”고 말했다. 그는 “행정은 새로 만들 수 있지만, 지역의 이름은 한 세대가 아닌 몇 세대를 걸쳐 쌓여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에겐 봉화가 곧 고향이고, 삶이고, 역사입니다. 이름이 사라지면 그 기억을 지탱할 이유도 없어져요. 영주·봉화 통합이 행정적으로야 필요할지 몰라도, 봉화의 이름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청주·청원 통합 사례는 영주·봉화 논의에 중요한 참고가 된다. 2012년 주민투표를 거쳐 2014년 출범한 통합 청주시는 초기 논의에서 ‘청원 이름을 지켜 달라’는 요구가 가장 큰 갈등 요인이었다. 청원군 주민들은 “통합이 곧 흡수”가 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통합 후 구(區) 명칭을 정하는 과정에서 ‘청원구’라는 이름을 남기는 절충이 이뤄지면서 갈등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 이는 행정 효율성보다 정체성 보존에 대한 신뢰 확보가 통합 성공의 핵심 조건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 “균형발전 없는 통합은 또 다른 중앙집권”
봉화가 우려하는 또 다른 문제는 ‘영주 중심 행정으로의 집중’이다. 통합이 단순히 ‘흡수’로 작동한다면, 봉화는 곧 주변부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통합의 균형을 잡기 위해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기관 분산 배치이다. 시청이 영주에 있다면 제2청사나 핵심 공공기관은 봉화에 둬야 한다는 논리다.
둘째, 산업 기능 분권이다. 영주는 산업·교통의 중심으로, 봉화는 산림·생태·관광 중심으로 특화해 역할을 나누는 구조다. 셋째, 문화의 자율 운영이다. 봉화은어축제, 송이축제, 춘양목 생태문화 등 지역 브랜드는 별도 예산과 조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갖춰지면 ‘하나의 행정, 두개의 문화’라는 새로운 통합 모델이 가능하다. 서로의 중심을 인정하고, 기능을 분리한 ‘균형 통합’이다.
■ 덴마크와 핀란드의 교훈-기능은 합치되, 정체성은 남겨라
2007년 덴마크는 전국 271개 시·군을 98개로 통합했다. 당시 중앙정부는 인구 2만 명을 기준으로 통합을 강제했고, 그 결과 행정 효율은 높아졌지만 주민 만족도는 초기 5년간 급격히 하락했다.
VIVE 연구소 커트 홀베리 교수는 “행정비용은 줄었지만 주민 신뢰는 10년이 지나서야 회복됐다”고 말했다. 그는 “통합은 숫자를 합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합치는 일”이라고 했다.
핀란드 역시 2007~2013년 ‘PARAS 개혁’으로 수십 건의 자율통합을 시행했지만, 지역 정체성 논란은 여전했다. 이에 핀란드 정부는 통합 시마다 ‘지역명 보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통합된 시·군이라도 기존 지역명과 로고, 교육기관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이 조치 이후 주민만족도가 12% 상승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 두 나라의 공통점은 하나다. 행정은 합쳤지만, 지역의 이름과 문화는 그대로 남겼다. 즉, 정체성을 지키는 통합이야말로 가장 지속가능한 통합이라는 점이다.
■ “하나는 행정, 둘은 문화”… 공존의 설계 가능할까
영주와 봉화는 이미 경제·생활권이 하나다. 주민 대부분은 병원, 장보기, 문화생활을 영주에서 한다. 봉화에서 벌어 영주에서 쓰는 돈이 40%가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행정까지 하나로 묶는 통합’은 이미 예고된 수순처럼 보이지만, 시기와 방식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행정통합보다 기능통합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 교통, 복지, 산림, 관광 등 공동 영역에서 협력 모델을 먼저 만들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행정 통합 여부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최근 영주시와 봉화군이 2027년 경북도민체전 공동유치위원회를 구성한 사례는 그 첫 시도로 꼽힌다. 하나의 시청보다 먼저 필요한 건, 함께 움직이는 경험이다.
■ “이름은 남기고, 신뢰를 더하자”
통합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주민의 신뢰가 없다면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정체성을 지키는 통합’의 핵심은 제도보다 약속, 조직보다 신뢰다. 청주·청원 사례처럼 ‘청원구’라는 이름이 남아 신뢰를 만들었듯, 영주·봉화도 봉화의 이름을 행정구역이나 법정 명칭으로 반드시 남겨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가령 통합시의 명칭을 ‘봉화영주 기초특례시’로 정하거나 ‘봉화권역청’이란 별도의 행정청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봉화의 한 청년(30대)은 “봉화가 사라지는 통합은 통합이 아니라 병합”이라며 “이름이 남아야 사람도 남는다”고 말했다.
영주 시민 역시 통합의 방향을 ‘흡수’가 아닌 ‘협력’으로 보길 원한다. 한 사회단체 관계자는 “영주 중심이 아니라 상생 중심으로 설계돼야 한다”며 “영주가 중심이 아니라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결론 — 정체성을 잃지 않는 통합, 그것이 진짜 ‘공동체’
통합은 행정지도 위의 선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정체성을 지키는 통합은 단순한 행정개편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는 일이다.
지금의 영주·봉화 통합 논의는 아직 시작 단계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이름과 상징, 역할과 권한을 정직하게 나누는 과정이야말로 이 지역이 지방소멸을 넘어설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영주와 봉화가 같은 지도를 나란히 공유하더라도, 그 지도 위에서 두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정체성을 지킨 통합의 증거가 된다.
서현제 발행인/ 오공환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