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집 속으로 고전 여행(37)

동진(東晉)으로부터 지금까지 천년이 지났는데 세상에서는 도연명이란 사람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맹자가 말하듯이, 그 시대를 논하고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중국이 남과 북으로 니뉘어져 난리가 계속되어 백성들이 하루도 평안하지 못했으며, 내란이 일어나 나라가 기울어질 지경이었다. 이때야말로 의사나 지사가 일어날 때였다.

그런데 도연명은 시골로 돌아갔다.

그의 시를 보면, 「걸식(乞食)」·「빈사(貧士)」·「원시(怨詩)」·「음주(飮酒)」 등은 그저 초췌하고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여 짐짓 술에 맡겨 속내를 풀었을 따름인 듯하다. 그런데도 후세 사람들이 그를 그토록 칭송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두보는 “도연명은 세상을 피한 늙은이이니 반드시 도에 통달했던 것이 아니다. 그가 지은 시를 읽어보면 역시 메마름이 한스럽다”하였고, 한유는 「취향기(醉鄕記)」를 읽고 “완적과 도연명은 마음이 화평하지 못했는데, 외물과 시비가 격동시키자 술에 의탁하고 술로 도피한 자들이다”하였다.

두보와 한유는 세상에서 이름난 선비이므로 인물을 잘 비평할 것인데 그들의 평이 이러했으므로 나의 의혹이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지금 동정(東亭) 선생(염흥방)의 「도연명 시 후서(陶詩後序)」를 읽으니, 거기에 “춥고 배고픈 고통이 시달리건만 유연한 즐거움이 있었으며, 술에 만취되어 세상을 몰랐지만 초연한 절개가 있었다”하였다.

이 대목을 읽고 나도 모르게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도연명인 까닭이었도다! 천 년 전 사람인데도 그 기침 소리를 듣고 얼굴과 모습을 접견하는 듯하다. 춥고 배고픈 고통에 시달리고 누룩술의 혼몽에 빠져 세상을 모른 것은 외적인 자취일 따름이고, 유연한 즐거움과 초연한 절개를 지녔던 것은 내적인 마음이다. 바깥에 있는 것은 보기 쉬우나 안에 있는 것은 알기 어렵기에 후학들이 그 울타리 안을 엿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두보와 한유가 말한 것은 자신의 처지를 빗대서 그렇게 말한 데 불과하다”

1376년(우왕 2)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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