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가 있던 시대
최근 OTT(인터넷 동영상 서비스)의 한 플랫폼에서 공개한 영화 <애마>를 보았다. 한때 우리나라 에로영화의 대명사이던 <애마 부인> 시리즈를 아는 터라 선입견이 없지 않았지만, 보여주고자 하는 방향성이 전혀 다른 영화였다. 애마 부인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시대상, 여배우들이 의미 없는 노출을 강요당한다거나 권력자들의 술자리에 불려가기도 하던 시절의 야만에 맞서는 두 여배우가 시대의 억압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 <애마 부인>은 1982년 개봉해 그해 가장 많은 관객이 본 영화였고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극장가의 포스터를 여배우들의 나신(裸身)과 ‘욕망’이라는 광고문구로 도배질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40년 저쪽의 1980년대를 소환해보지 않을 수 없다.
1979년 10.26의 궁정동의 총소리, 12.12 군사 반란, 5.18의 잔혹사를 거치며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전두환 정권, 우리가 흔히 ‘5공’으로 부르는 그 시대의 이야기다. 불의와 폭력이라는 태생적 결격사유와 함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담보되지 않은 그 정권은 국민들을 회유하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흔히 ‘3S’로 불리는 정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 섹스(Sex)를 이르는 말이다.
1980년 말에는 컬러 TV가 방영을 시작했고 프로 야구와 프로 씨름, 프로 축구가 연이어 생겨났다. 세상은 운동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일제강점기만큼이나 오래 국민들을 묶어놓고 있던 통행금지도 해제되고 교복 자율화까지 이루어졌다. 정치적 자유를 옭아매는 대신 시민들에게 일상의 자유로 인심을 쓴 것이었다.
그리고, 스크린과 섹스의 시대가 열렸다. 표현의 자유와는 사뭇 다른 불순한 의도로 태어난 게 <애마 부인>이었다. 금지곡이나 금서(禁書)의 굴레는 더욱 조여졌지만 스크린에서의 여배우의 노출 수위는 <애마 부인>에서 고삐가 풀렸다. ‘애마(愛馬)’라는 말이 종마(種馬)를 연상시킨다고 검열기관에서 제동을 걸어 ‘애마(愛麻)’로 바꾸어 개봉했다.
눈 감고 야옹 식의 검열이었다. 첫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자 <애마 부인>이라는 제목을 단 영화들이 열세 편이나 만들어졌다. <파리 애마>, <집시 애마> 등이 뒤를 이었고 심지어는 <시네마 천국>을 패러디해 <신(新)애마 천국>이라는 제목의 영화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통금이 해제된 심야극장 스크린은 여배우들의 노출로 가득 찼다. ‘부인(夫人)’이란 남의 아내를 높여서 부르는 고상한 말이건만 불온한 상상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 시절 프랑스의 대표 에로 배우 실비아 크리스텔의 영화 <엠마뉴엘(Emmanuelle)>도 우리나라에서는 <엠마뉴엘 부인>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1956년, 정비석의 인기 신문연재소설 <자유부인>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한 평범한 대학교수의 부인이 잠시의 일탈을 했다가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다는 요즘으로 치면 그다지 자극적이지도 않은 이야기였지만 그 시대의 윤리적 기준에서는 큰일 날 일이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되었는데 극장의 광고판에 계란을 투척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시대가 변하기는 변하는가 보다.
2025년의 영화 <애마>에서 제작사 사무실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영자의 전성시대>였다. 지금은 잊혀진 배우 염복순 주연의 그 영화는 1975년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영자에게 가정부, 호스티스, 여공, 버스 차장으로서의 삶은 상처와 아픔이 전부였다. 그래도 한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살아내어야 하는 산업화 시대의 소외받던, 그러나 희망이라는 걸 못내 버릴 수 없던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그 전 해의 최고의 흥행작은 최인호의 연재소설을 영화화한 <별들의 고향>이었다. 호스티스였던 경아의 죽음은 부끄러움과 눈물로 우리에게 다가왔었다. 우리는 방관자였던 것이다. 영자와 경아는 산업화 시대의 어둠에 묻힌 우리네 여동생들의 이름이다. 우리는 그 야만과 폭력의 시대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을까? 영화 <애마>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