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의 여인들
강릉이 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물난리 때문이다. 폭우로 인한 홍수의 물난리가 아니라 강수량의 부족이 가져온 물난리다. 장기간 지속된 가뭄으로 강릉 지역의 급수원이던 오봉 저수지의 저수율이 15%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을 보여 제한 급수가 불가피하다고 하다고 하니 난리는 난리다. 여러 해 전부터 우리는 ‘유엔이 정한 물 부족 국가’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유엔은 우리나라를 물 부족 국가로 지정한 적이 없다. 잘못된 정보가 공익광고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져온 것이었지만 이번 사태로 그 말의 심각성을 현실로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너는 관능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쾌락을 우리 속 깊이 사무치게 한다’ 프랑스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大地)>의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너’는 물론 ‘물’이다. 생텍쥐페리는 우편 비행기의 조종사였고 그 소설은 그가 엔진 고장으로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했던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것이다. 그것은 재난 소설이라기보다는 사막이라는 광활한 자연 한가운데 고립된 상황에서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사막에서의 물 한 모금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그의 말처럼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물이란 생명 그 자체이다. 우리 몸의 65%는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무엇보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胎中)에서 양수(羊水)에 싸인 채로 생명을 시작한다. 과학자들은 생명의 기원을 수십억 년 전의 바다에서 찾고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인류의 4대 문명도 그 이름에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황하강 등 강 이름을 품고 있다. 인류에게 가장 필수적인 물가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얘기다.
지금이야 땅속으로 관정(管井)을 뚫거나 저수 댐을 만들어 갈수기에도 농업용수를 공급받지만 자연천(自然川)이 유일한 급수원이던 시절에는 물싸움이 흔히 보던 풍경들이었다. 제 논으로 물꼬를 트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 실랑이는 험한 욕설이나 폭력으로 비화하기가 일쑤였다. 물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할 만큼 절실한 생명줄이었던 것이다. 적수나 경쟁자를 뜻하는 영어의 ‘라이벌(rival)’이라는 말도 그 물싸움에서 기인한 것이다. 강(river)을 사이에 두고 농지에 물을 대거나 가축들에게 물을 먹여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로가 불편하고 껄끄러운 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계은행은 20세기는 석유 전쟁의 시대였으나 21세기는 물 전쟁의 시대가 될 거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이미 수없이 많은 물 전쟁의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앙숙인 데는 종교의 문제도 있지만 인더스강의 요인도 크다. 인도가 인더스강에 댐을 건설해 그 지류를 막아버리면 하류의 파키스탄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1970~80년대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가 있던 스웨덴 출신의 그룹 아바의 노래 <페르난도(Fernando)>에도 거대한 물싸움의 사연이 들어 있다. ‘그 북소리를 기억하는가, 페르난도? 기억하는가, 우리 함께 리오그란데강을 건너던 무서웠던 밤을(the frightful night we crossed the Rio Grande)’ 리오그란데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미국 멕시코 전쟁(1846~1848)이었다. 인용한 그림은 르네상스의 화가 아니발레 카라치의 <우물가의 여인>이다. 성경에는 예수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예수는 고단한 삶에 지친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여기에서의 샘물은 ‘의미 있는 삶’의 은유일 것이다.
후세의 사이비 교주들 가운데는 병에 든 샘물을 생명수라는 이름으로 팔기도 했다. 병에 넣어 돈을 받고 파는 물에 무슨 생명이 들었겠는가? 상수도가 없던 시절, 마을마다 샘이 하나씩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급수원이었음은 물론이다. 물을 퍼 집으로 나르는 일은 온전히 여인들의 몫이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짚으로 만든 똬리 위에 물이 가득 찬 항아리를 머리에 얹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잠깐이었지만 우물가에 앉은 여인들의 이야기는 끝날 줄도 모르게 이어지곤 했다. 아마도 오늘날로 치면 SNS의 아파트 부녀회 단톡방이었다고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