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영주人터뷰 [84] 서울냉동공조(LG냉동) 이종철 대표

영주2동 우체국 앞
영주2동 우체국 앞
월남전 참전 시절
월남전 참전 시절
이종철 대표
이종철 대표

10대 피란길, 생존에서 배움을 얻다

월남전에서 터득한 기술 “평생의 밑거름”

 

냉동·에어컨 개척…지역 산업의 동력

80대에도 현역, 봉사와 철학으로

“일하는 동안은 젊다” 올해 여든을 맞이한 이종철 대표의 인생을 관통하는 말이다. 그는 지금도 영주에서 냉동·에어컨 기술자로 현역에 서 있다. 1970년대 초반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냉동·냉장 시장을 개척했고, 지역 최초로 냉동 기계를 보급한 주역이다. 그의 삶은 전쟁과 가난, 도전과 개척, 봉사와 철학으로 이어져 있다.

10대 피란길, 생존에서 배움을 얻은 이 대표의 어린 시절은 6·25 전쟁과 함께 시작됐다. 1940년대 후반 단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는, 여섯 살 무렵 전쟁이 터지자 가족과 함께 단양을 떠났다가 1951년 1월 중공군 후퇴 때 화물차를 타고 대구 근교 경산으로 피난을 갔다.

피란길은 곧 생존의 교과서였다. 천주교 선교자들이 선대였던 그는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어 나뭇잎과 풀뿌리로 허기를 달래고, 신발조차 닳아 맨발로 걷는 날이 많았다.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웠던 시절 그러한 경험이 오히려 그를 강인하게 만든 것이다.

피난 생활 중에도 공부를 이어갔다. 단양 대강면 장정초등학교와 제천중학교를 거쳐 서울의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현 수도전기공고) 전기과에 진학했다.

당시 전기 분야는 경성(전차·가정)·남선(발전)·조선(전선) 전기로 통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전력으로 통합돼 국가적으로도 희소한 기술 인력이 필요하던 분야였다. “기술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공부하며 실습실, 공장 현장 등을 오갔다.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기술을 익혔다. 낯선 서울 생활을 견뎌내며 배운 전기·기계 기술은 훗날 인생의 무기가 됐다.

특히 경성전기공고는 한국전력 직영으로 운영돼 엄격한 실습과 훈련을 요구했는데, 그는 오히려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곧 내 인생의 무기가 됐다”고 자주 회상하고 있다.

졸업 후 철도청에 입사해 객화차사무소 전기부서에서 근무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배운 기량을 마음껏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 그는 “내 이름을 걸고 당당히 일하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됐다.

# 월남에서 미군 장비를 보고 터득한 기술 “평생의 밑거름”

1967년, 20대에 그는 군에 입대해 맹호사단사령부 보안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파병됐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의 삶은 청년에게 또 다른 시험대였다. 그는 총 대신 공구를 들고 미군 보급기지에서 냉동·냉장 설비와 에어컨, 보일러 설비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당시 미군의 냉동·전기 기술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첨단이었다”고 회고했다. 대형 냉동창고, 자동온도 조절 시스템, 대규모 전력 공급 장치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던 시절 그는 낮에는 장비를 점검하고, 밤에는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매뉴얼을 번역하며 공부했다.

전쟁터라는 극한 상황에서 배운 기술은 오히려 평생의 밑거름이 됐다. 미군의 철저한 장비 관리와 표준화된 작업 방식은 그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았다. “전쟁터였지만 내겐 또 하나의 학교였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배운 기술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귀국 후 그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냉동 저장고와 에어컨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철도청 근무시절
철도청 근무시절
업소용 냉동 저장고
업소용 냉동 저장고

# 30대 냉동·에어컨 개척…“지역 산업의 동력”

1972년 봄, 서울 이태원 소재 기술학원에서 고압가스 냉동기계 필기·실기 기능사 기술 자격증을 딴 후, 그는 실습을 하면서 다녔다. 그다음 해 영주에서 ‘서울냉동공업사’를 정식으로 개업했다. 우리고장 영주의 인구가 14만~15만이었던 시절이다, 자동차가 없어 전부 도보로 다니던 시절이며, 당시 부석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였다는 그는 개인 기업으로 시작했지만, 자신이 배운 기술 모든 것을 지역에 쏟아부었다.

당시 영주와 인근 지역에는 냉동·냉장·에어컨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다. 영주에는 이름있는 업체가 없을뿐더러 냉동 기술자도 없었다. 여름이면 아이스크림(하드)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 녹아내렸던 시대다. 이 대표는 모터를 직접 조립해 설치했다. 식육점·하드 공장에 이어 에어컨 실외기라는 신문물을 만날 때까지 실력을 발휘했다.

스티로폼도 없던 시대였다. 톱밥이 보온력을 대신하던 시절에 업소용 냉동 저장고를 팔았다. 그는 직접 발로 뛰며 거래처를 찾아다녔다. 작은 식당에 냉장고를 설치해주고, 식육점에는 냉동고를 맞춤 제작했다. 전화 한 통이 오면 한밤중에도 공구를 들고 달려가 고쳐줬다. “내가 설치한 곳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원칙 덕분에 입소문은 금세 퍼졌다.

1984년도에 그는 금성사(GOLD STAR) 냉난방 전문점으로 확장했다. 이어 1995년도에 현 LG(엘지)로 로고와 브랜드명이 변경되면서, LG 에어컨 전문점, LG 냉동 영주 전문점, 안동 쇼케이스 특약점 등을 운영하며 굴지의 설비업체로 키워냈다. 에어컨, 온풍기, 냉동창고, 슈퍼 쇼케이스, 업소용 냉동냉장고 등 다양한 설비를 다루며 지역 경제를 뒷받침했다.

그의 손을 거친 장비는 영주뿐 아니라 태백, 단양, 예천, 봉화 등지까지 퍼져나갔다. 한여름 더위 속에서 에어컨을 설치하던 기억, 강원도 눈보라를 뚫고 냉동창고를 점검하러 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장비뿐만 아니라 직원들 또한 성장해 따로 개인 사업장을 내 성공한 케이스도 많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냉동 시스템 없이는 여름 장사가 불가능했던 말이 정설이 되던 시절, 이 대표의 위력은 지역 상권의 버팀목이자 “냉동·에어컨의 선구자”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금성사(GOLD STAR) 시절_제품 관련 기록지
금성사(GOLD STAR) 시절_제품 관련 기록지
새마을금고 이사장 취임식(2000. 5.4)
새마을금고 이사장 취임식(2000. 5.4)

# 부실채권 129억원 안고 “12년 동안 중앙새마을금고 맡았던 이사장”

IMF이후 새마을금고연합회 경북도지부에서 감사를 왔던 시점에 부실 위험이 컸던 2곳과 합병하라는 지시를 받아 중앙새마을금고가 새롭게 탄생했고 이곳에서 이사장을 3번 연임하기도 했다. 2000년 5월 4일 이사장으로 취임했던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과 회원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신념 하나로 손실금고액 129억 원을 2011년 말에 흑자전환을 하며 그 이듬해 4월 30일 퇴임했다.

“당시 중앙회에서는 18년은 더 겪어야 부실채권을 복구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 대표는 “12년 동안 금고 운영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운영하면서 회원들과 시민들에게 신뢰를 보여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50대의 삶을 이미 기록한 바 있다.

그는 어려울 때는 월 하루 5만 원씩 일급으로 받았다. 빚이 많았던 시절로 10여 년 차부터는 급여로 책정돼 관리됐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못 올려주면서 어렵게 일궈나갔던 때라고 밝혔다.

당시 ‘하면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을 따랐던 그는 오늘날 이어져 온 박정희 동상 건립에도 힘을 쏟아 부었다. 특히 지역 최초로 월남참전전우회를 창립했을 정도로 이 대표의 패기와 열정이 대단했음을 엿볼 수 있다.

영주청년회의소 특우회에서도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그 만의 리더십은 반세기를 넘어서도 후배들에게 뜻이 이어지고 있다. 근무지에서는 직원들과의 온화한 유대관계로, 그 외에 단체 활동에서는 회원들과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로 일군 삶이 만 12년 만에 흑자 경영으로 돌아설 수 있었던 고진감래 시절이다.

값진 삶이 준 노력은 도덕과 정직을 바탕으로 키운 금융업계를 3번이나 이끌며 도맡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기술 교본책 등을 오랫동안 보관해오며 엘지냉동 역사를 증명한 이종철 대표는 고난의 세월을 뒤로하면서도 일터의 직원들을 전문가로 꾸준히 키워내기도 했다.

1990년대 활동환 사진
1990년대 활동환 사진
월남참전전우회 회원들과 함께
월남참전전우회 회원들과 함께
가족들과 해외여행
가족들과 해외여행

# 80대에도 빛난 ‘현역’, 봉사와 철학으로

60대 이후 사업이 자리를 잡자 그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영주청년회의소 활동을 시작으로, 월남전참전회 창립, 바르게살기운동, 체육후원회, 새마을금고 이사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그의 봉사는 늘 조용하고 꾸준했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전우들의 건강과 생계를 돕기 위해 고엽제 피해자 가족을 찾아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배움에 대한 열정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90년대 대구대학교 사회교육대학원에서 만학도의 길을 걸었다. “못다 배운 공부가 한이 돼 촌음을 아끼며 학업에 매달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아직까지도 은퇴를 선택하지 않았다. 월남전에 참전한 당시를 잊지않고 살아가는 삶이어서일까? 70대에도 여전히 현장을 누비며 땀을 흘린다. 장인 정신을 이어가듯 기술은 늘 진화할지라도 “내가 배운 기술은 내 것만이 아니다”라는 신조로 버텨온 세월을 위해 “지역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신념이다.

현재 80세이고 미국 나이로 일흔여덟이라는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공구함을 챙겨 출근하고, 거래처를 돌며 설비를 점검한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건강을 관리하지만, 여전히 기술자로서의 손길은 쉼이 없다. 그는 후배들에게 늘 같은 말을 남긴다.

“나이를 세지 말고, 하루를 세라. 오늘 내가 할 일을 끝까지 하면 그게 가장 값진 인생이다”

이 대표는 삶은 곧 ‘개척’의 역사이며 선구자가 살아남는 세상이라는 진리를 남기고 있는 산증인이다. 10대 때 전쟁의 폐허 속에서 기술을 배우고, 20대 때 전쟁터에서 세계를 만났으며, 30대에는 지역 최초로 냉동·에어컨을 보급했다. 그리고 80대가 된 지금도 현역으로 살아가며 봉사하는 철학을 잃지 않는다. 그의 인생은 영주 지역민들에게 귀감이자, 도전과 성실의 교과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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