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전 단종 절신 황지헌 선비, 영주에 터 잡아
창원황씨 종택이 있었던 배고개… 슬픈 역사 간직

역사가 흐르는 '배고개둔치' 전경
역사가 흐르는 '배고개둔치' 전경
배고개 마을(롯데하이마트 북편)
배고개 마을(롯데하이마트 북편)

영주시보건소가 주최하는 「제16회 시민건강 체험마당」행사가 9.2(화)∼9.4(목) 19:00∼21:00 서천 ‘배고개둔치’에서 개최된다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다.

‘배고개둔치’는 영주교 건너에 있는 LG전자·영주법원(등기소)·주공3단지아파트 앞에 있는 둔치이다. 그리고 ‘배고개’는 주공3단지 서쪽·롯데하이마트 북편 낮은 산 아래로 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이곳은 ‘배(梨:배나무 이)도 없고, 고개(峴:재 현)도 없는데 왜, 배고개(梨峴)가 되었을까?’가 궁금하다.

배고개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조선 초 단종 임금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양대군(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왕자 시절 군호)이 왕위 찬탈을 위해 계유정난(癸酉靖亂, 1453)을 일으켰을 때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다 영주(당시 영천)로 귀양 온 황지현(黃知軒, 1411∼1462)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귀양이 풀렸으나 한성(漢城)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현 가흥2동 롯데하이마트 주변으로 추정)에 터를 잡아 살게 됐다. 황지헌은 자신이 태어난 서울 동대문 이현동(배고개)을 그리워 하는 마음에서 이곳 마을 이름을 ‘배고개(梨峴)’라 부르기로 했다.

창원황씨 배고개 종택 구지(舊址)-택지 주유소 자리
창원황씨 배고개 종택 구지(舊址)-택지 주유소 자리
창원황씨 대룡산 종택(현재 종택의 모습)
창원황씨 대룡산 종택(현재 종택의 모습)

영주로 귀양 왔다가 배고개에 정착한 황지헌은 단종절신(端宗節臣)이었다. 그는 단종 1년(1453) 계유정란 때 황보인·김종서와 그의 중형 황의헌(黃義軒)이 순절(殉節)하자 이에 연루되어 영주로 귀양 오게 됐다. 황지헌은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적극 가담하여 합력하였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丁丑之變, 1457)로 돌아가자 매우 비통해하였고, 영월로 유배된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그는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자연에 은거한 채 학문에만 열중했다. 당시 절의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은 황의현·황지헌 형제를 일컬어 ‘사육신에 버금간다’며 추앙했다.

배고개 창원황씨는 회암(檜巖) 황석기(黃石奇, ?~1364)를 시조로 삼는 창원황씨 일맥의 한 줄기다. 시조의 4세손인 황지헌은 서울 이현동에서 태어나 음(陰)으로 벼슬이 예빈시 사정에 올랐다. 황지헌의 후손들은 배고개에서 400여 년간 세거해 오다가 조선말(1890) 19세손 황상현(黃相鉉, 1835∼1898)이 대룡산으로 이거함에 따라 종택도 대룡산으로 옮겨 갔다.

황춘일 창원황씨 종손은 “황지헌 할아버지의 5대손인 농고 황언주(黃彦柱, 1553~1632) 선조께서 배고개에서 대룡산으로 터전을 옮긴 것은 이곳 대룡산에 사는 순흥안씨 안윤금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 마을로 옮겨 살게 위해서였다”면서 “현 가흥2동 롯데하이마트 맞은편 택지주유소 자리가 창원황씨 종택 구지(舊址)로 추정된다. 그곳에 60여 칸에 달하는 종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계유정란 때 배고개에 정착한 창원황씨는 정축 지변의 비통함과 단종 승하의 슬픈 역사를 담은 ‘단종애사(端宗哀史)’를 배고개 둔치를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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