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 고향은 그리움의 원천이죠”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무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편집자 주>
풍기 수철리에서 시작된 삶, “고향은 늘 그림움의 원천”
기자·논설위원 30년, 그리고 글·방송·강의로 이어진 제2의 인생
산문집 『허튼소리』…“막말의 시대에 바른 언어를 전하고 싶었다”
"인구소멸 위기 영주, 문화관광 인프라 구축에 힘써야"
신간 산문집 『허튼소리』가 출간되었다. 글품, 말품, 발품의 ‘3품’을 판 작품이다. 바로 우리 지역 출신의 이규섭 언론인이 저자이다. 그의 ‘허튼소리’는 사실 ‘바른소리’이다. 그는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국민일보 논설위원으로 퇴임했다. 그의 칼럼과 논설에는 날카로운 비평과 따뜻한 통찰이 담겨있다.
퇴임 후 (사)대한언론인회 사무총장과 이사, 편집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시인·칼럼니스트로서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 미디어 교육 강사로도 활동했으며, 전국의 학교와 기관에서 신문을 활용한 교육을 통해 언론의 공적 기능을 알렸다.
반갑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셔서 성장하셨는지요?
태어난 곳은 풍기읍 수철리 무쇠달 마을입니다. 창락초등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 때 읍내로 이사하면서 풍기초등학교로 전학했어요. 책보를 둘러메고 신작로를 터벅터벅 걸어 등교하던 저학년 시절이 판화처럼 선명합니다. 교실이 한 동뿐이던 금계중학교를 나와 안동농림고등학교(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타향살이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이번 달에도 고향에 들리셨습니다. 형제자매 중에 고향을 지키시는 분도 있나요?
해마다 벌초하려 꼬박꼬박 들렸고, 수철리 옛 물레방아 터 식당에서 육남매 식솔들이 함께 여름휴가를 보냈으니, 고향은 늘 그리움의 원천이지요. 서울살이하던 막내 누님 내외가 수철리에 귀향해 있습니다. 백신2동에 종형수가 살고, 종질도 풍기에 있어요.
고향(사람, 장소, 사건, 일, 기타) 관련 활동과 인연을 소개하시면?
‘(전략)팽창하는 여름 숲의/ 싱그러운 살내음/ 가슴까지 차고 넘치는/ 시린 물물기가/ 무더위에 지친/ 바람의 이마를 닦아 준다.’ .. 고향을 그리는 제 시의 일부입니다. 깨끗한 환경을 후대에 물려주고파 환경시민단체에 가입해 활동도 했었지요. 금수강산이던 우리나라 자연이 날로 황폐해져서 안타깝습니다.
2년 전 오월, 퇴직 언론인 포럼 회원 8명과 2박3일 영주시 관내 문화유적 탐방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가 일정을 짜고 안내를 맡았죠. 서울서 영주까지 KTX로 오가는 것은 빠르고 편리했는데 현지 이동차량이 문제였습니다. 택시요금 50%를 영주시에서 지원하는 제도가 있어 유용하게 활용했습니다.
오랫동안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셨습니다. 간략하게라도 소개 부탁합니다.
언론환경이 많이 변했습니다. 저가 입사하던 1970년대만 해도 언론고시라 할 만큼 입사가 어려웠고, 힘든 만큼 긍지와 보람도 많았어요. 요즘은 1인 미디어 유튜브가 대세가 됐습니다. 언론인 30년 치열하게 살았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No Good’입니다. 성취감도 있지만 극한직업이니까요. 업적이라며 그동안 ‘판소리 답사기행’(1994. 민예원)등 신문에 연재 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게 몇 권 됩니다.
6월 말 신간 산문집 『허튼소리』를 내셨습니다. 제목을 '허튼소리'라 하신 이유가 있나요?
막말이 판치는 세상을 꼬집는 패러독스(Paradox)죠. 요즘 우리 세상엔 모진 말, 모난 말, 거친 말, 거짓 말, 날선 말들이 마음을 할퀴며 덧나게 하고 있어요. 막말과 조롱에 우리 사회가 멍들고 있습니다. 언어가 품격을 잃으면 인격도 말살됩니다. 나의 언어가 혼탁한 세상에 얼룩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에 역설적으로 ‘허튼소리’로 지었습니다.
책에는 글품, 말품, 발품을 판 122개의 글이 있군요. 간략히 소개해 주시면?
신문 기자 재직 시절의 칼럼이나 사설 등은 배제했습니다. 퇴직 후 제2 인생을 열며 활동한 분야가 글쓰기, 방송 출연과 미디어 강사, 버킷리스로 퇴직 후 해마다 한 번씩의 해외 여행을 떠났고, 여행기를 중심으로 요약해 분류하니 ‘글품, 말품, 발품, 삼품’이 됐습니다.
IMF시기 신문 기자 퇴직 후에도 글을 쓰셔서 무려 81개 매체에 글품을 기고하셨더군요?
퇴직 시기가 IMF 여파와 맞물려 불안감이 컸습니다. 기자 30년을 활자와 더불어 살아온 터라 무엇을 하며 어떻게 제2의 인생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활자의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건 모험이라 판단했지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 글품을 팔려면 ‘글밭’의 개간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퇴직 1년여 전 타사 신문사 논설위원을 포함하여 영화인과 출판인, 문화전문 기자 등이 의기투합하여 ‘서울칼럼니스트모임’을 만들어 1999년 9월 19일자로 전자 칼럼신문 첫 호를 발행했습니다. 그 사이트를 통해 원고청탁이 많이 들어왔어요. 일간지, 대학신문, 공기업, 사기업 사보의 원고청탁을 많이 받았습니다.
‘허튼소리’ 출판기념회도 성황리에 열렸다면서요?
지난 6월 27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90여 명이 참석 성황을 이뤘습니다. 언론계 최고령 98세 한영섭 6·25종군기자를 비롯하여 원론 언론인 박기병 전 대한언론인회 회장, 김진배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전 국회의원), 문화예술계 인사 등이 자리를 빛내주었습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집행위원장이 축사를 했습니다. 중학교 동창 3명도 초대했어요.
글품 파는 신문기자 출신이 말품을 팔기란 녹록치 않았을 텐데요? 더구나 생방송이라면..
2001년 KBS1‘라디오24시’ 프로그램에서 생방송으로 그날의 사회분야 핫뉴스를 소개하고 논평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생방송이라 늘 긴장됐죠. 8분 안팎 방송을 위해 8시간 가까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으니까요. 그날의 사회 뉴스를 추적 분석한 뒤 담당 PD와 전화로 그날 다룰 ‘뉴스 초점’과 ‘시사 토크’ 주제를 정합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닷새 동안 되풀이 되는 생방송이라 녹록치 않았습니다.
생방송 말고도 방송 출연한 프로그램들이 있다면서요?
네, KBS 제3라디오 ‘한민족 우리 노래’는 현직 때 2년 방송했습니다. 저서 ‘판소리답사기행’의 명인·명창들의 취재 뒷이야기 위주로 이야기를 풀었지요. 중간중간 판소리를 들려주지만 1시간 프로로 긴 편입니다. 1주에 두 번 스튜디오에 들러 6일 치 분량을 녹음했어요.
논설위원 시절 KBS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에 출연, ‘실업파고 어떻게 넘을 것인가’를 주제로 노사정활동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어요. 퇴직 후 KBS2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노주현입니다’ 출산장려정책 패널로 출연, 시대별 산아제한 표어와 배경을 설명해 흥미를 끌기도 했지요. KTV국민방송 ‘문화 산책’ 생방송과 ‘TV시간여행’ 녹화방송 등에 출연했습니다, 방송 출연은 글쓰기보다 어렵더군요.
미디어 강의도 오래 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강의를 소개하시면?
파주 한민고등학교는 기숙형 군인자녀학교로 학생들의 집중도가 높아 강의할 맛이 났지요. 운동장 끝이 바다인 포항 구룡포중학교는 2시간 강의를 위해 KTX, 시외버스 등 왕복 6시간을 길에서 소비해도 힘든 줄 몰랐어요. 영주고등학교 논술반 12차 24시간 특강은 고향 후배들이라 각별히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중등교원직무연수’와 공무원 대상 특강도 기억에 남습니다. 10년 동안 지도안을 준비하고 가르치며 내가 더 많이 배웠던 시기입니다.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시들어가는 육신에 푸른 피를 돌게 했습니다. 미디어교육 강의는 내 인생의 황금기를 빛낸 행복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지요.
퇴직 후 버킷리스트가 ‘1년에 한 번 해외여행을 떠나자’였다면서요? 여행기도 쓰시고...
네, 여행은 설렘과 함께 삶에 활력을 줍니다. 여행은 체력과 경제적 여력이 뒷받침돼야 하니 그리 쉬운 건 아니죠. 퇴직 후 1년에 한 번 24년간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현직 때와 퇴직 후를 통틀어 42개국 159개 도시를 여행했습니다. 여행기는 신문과 사보의 감초 같은 콘텐츠입니다. 여행은 보편화 단계를 넘어 전문화, 특성화 단계로 진화됐습니다. 여행 기사도 차별화가 필요한 이유지요.
가령 관광지 위주 소개 보다, 영화 ‘로마의 휴일’을 따라가 본 로마‘로 포맷을 바꿔 쓰니 색다른 맛을 낼 수 있었습니다. 여행이란 한마디로 설렘입니다. 일상의 틀을 벗어나는 설렘,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설렘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요. 대자연의 경이로운 풍광과 역사가 서린 유적과 마주하면 벅찬 설렘이 시공을 넘나듭니다. 낯선 길 위에서 만나는 다양한 삶은 내 삶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설렘이지요.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하셨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지난해 여름 ‘폭염 열차’를 타고 이론 및 실기, 현장 실습 등 320시간을 투자하여 자격증을 땄어요. 최고령 수강생이었죠. 척추협착증 수술을 받은 아내가 요양 등급을 받으면 가족 요양을 하려고 준비했는데, 현실이 되어 아내를 케어하고 있습니다.
평생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 관련 글을 쓰셨는데 젊은 세대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요즘은 밥상머리 교육이 사라지고 유아기부터 공공기관에 의존하고 있지요. AI시대에 부모의 교육관도 바뀌어야 합니다. 무엇이 되기를 바라기보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 것인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고향 영주와 관련, 하시고 싶은 말씀을 부탁합니다.
영주시가 발행하는 홍보지를 빠지지 않고 보내줘 고맙고, 영주가 뿌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영주를 비롯 경북 북부지역이 인구소멸지구에 속한다는 보도가 씁쓸합니다. 정부와 지자체가 대책을 쏟아내지만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걷돌고 있어요.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죠,
‘고향올래(GO鄕ALL來)’ 사업은 말장난 같은 느낌도 들고요. 은퇴자 마을 조성보다는 공동 주택을 제공하고 공동으로 농업을 운영하는 한 지자체의 성공 사례가 가슴에 와닿더군요. 영주는 안동과 연계된 관광인프라 정책 구축에 세심한 대안을 마련했으면 싶네요.
<언론인 이규섭 프로필>
- 1946년 경북 풍기 수철리 태생
- 창락초등학교 입학 풍기초등학교 졸업, 금계중학교 졸업
- 안동농림고등학교 졸업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수료
- 경향신문 기자·국민일보 기자
(논설위원으로 퇴임)
[퇴임 후]
- (사)대한언론인회 사무총장·이사·편집위원장 역임
- 시인·칼럼니스트(집필 활동 지속)
- (전)미디어 교육 강사 활동
- 저서
시집 『‘바람멀미』, 『사라지는 풍물』, 『별난 사람들』, 『판소리 답사기행』,
어린이 생태기행 『자연아 놀자』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