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복 (소백산백년숲 사회적협동조합 이사)

황해도 연백군은 조선말까지 연안군과 백천군 두 고을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합쳐져 연백군이 되었다. 연안은 남쪽 바다를 건너면 바로 강화 교동도가 바라보이고 동편은 개성과 맞닿은 곳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할아버지는 아들 하나와 딸 둘 그리고 배부른 아내를 두고 병 앓다 세상 버렸다. 할머니는 큰딸을 민며느리로 보내고 유복자를 낳았다. 몸 추스를 겨를도 없이 해본 적도 없는 떡 장사를 시작했다. 새벽에 떡 광주리를 이고 사람이 모이는 곳을 다니며 떡을 팔아 자식들 먹이고 남은 돈을 모아 마을 입구에 있는 연자방앗간을 사서 운영했다.

연자방앗간을 돌리며 배곯지 않고 사는가 했는데 정월 대보름날 연자방앗간에 불이 났다. 열세 살 먹은 아버지가 동무들과 논두렁에서 불망우리를 돌리며 놀다 동네 입구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불구경 났다고 달려갔다. 가보니 할머니가 기둥 몇 개만 남은 마구간에서 죽은 말 앞에 주저앉아 넋이 나가 있었다. 밤새 뜬눈으로 새운 할머니가 아침도 안 먹인 막내 손목을 이끌고 연백서 제일 부자라는 김씨 댁으로 갔다.

마당 쓸던 사람들을 불러, 배나 곯리지 말아 달라며 들이밀고는 주인도 보지 않고 돌아서 왔다. 십 년 넘게 떡 팔아 장만한 연자방앗간과 실한 말 두 필을 모두 태우고 나니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었단다. 아버지는 그렇게 열세 살에 김씨댁 머슴이 되었다. 머슴살이 십수 년이 되어갈 무렵 어느 날, 마당에서 묵직한 전대를 주웠는데 이만한 돈을 지닐 사람은 주인 영감 말고는 없다고 여겨 주운 전대를 주인 방에 놓아두었다.

며칠 더 지나자 주인어른이 자기 방을 정리해 두라며 집을 나섰는데 방에 가보니 장부와 지폐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혹시 노망이 난건 아닌가 하며 장부와 지폐를 확인해서 서랍에 정리하고 며칠을 유심히 살폈지만 더는 노망이 없었다.

얼마 후 주인은 자기 큰아들의 둘째 딸을 아홉 살이나 많은 머슴에게 시집보내고 넉넉한 집과 적잖은 땅을 떼주어 세간을 내주고는 치부장부를 다 맡겼다. 그즈음 해방이 되고 38선이 그어졌다. 아버지의 집은 38선 남쪽에 있었고 주인의 집은 북쪽이 되었고 농지는 얼추 반반으로 갈렸다. 처음엔 경계를 오가며 집안을 돌봤지만 얼마 못 가서 오가는 길이 막혔다. 북에 남은 아버지의 처조부는 식솔들을 남으로 피신시키고 북에 남았는데 소식이 끊겼다.

6.25 전쟁이 났을 때는 언제 전쟁이 났는지도 모르게 평온하게 지냈다. 38선 남쪽이지만 전선은 개성부터 시작됐으니 멀리서 들리는 포성을 듣고 난리가 난 줄은 알았으나 피난이고 어쩌고 할 게재가 아니었다. 그해 따라 아버지의 농사는 대풍이었다. 공산당에 7할을 공출당하고도 겨울날 만큼은 남았다. 그해 추수가 끝나갈 무렵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완장을 찬 군관이 죽창 든 병사들을 데리고 와 사람들을 모았다.

한 집에 한 명씩 부모를 모시고 농사지을 사람 하나를 남기고 성인 남자들은 모두 주재소로 나오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불러서 농사일에 검게 그을린 아버지가 농사와 노모를 모시는 것으로 하고 천정에 벽지를 뜯고 큰아버지를 숨겼다. 숨구멍으로 주먹밥을 넣어주고 대소변은 요강에 보며 이틀을 버티니 완장 찬 군관이 병사들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아버지를 보고는 농사 돌보는 턱이라 하고 나머지는 아들은 어디 갔냐고 다그치자 따라온 병사들이 죽창으로 천정을 찌르며 다니자 겁에 질린 큰아버지가 덧바른 벽지를 들치고 내려와 끌려갔다. 큰어머니는 실신해 쓰러지고 할머니는 넋이 나갔다. 포성이 가까워지고 비행기 소리가 요란했다.

새파랗게 어린 처와 자식을 두고 큰아들이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여긴 할머니는 며느리가 서러워 울었다. 온 식구가 넋이 나가 초조하게 지새던 밤에 “오마니이”하고 부르며 큰아버지가 돌아왔다. 큰아버지는 후퇴하는 인민군 군수품을 나르는 수레를 밀고 가다가 미군 비행기 폭격 때 도랑에 숨어있다가 도망쳐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집에 왔다.

닷새 만에 큰아버지가 돌아오자 할머니는 말없이 울기만 했단다. 그해 겨울에 해주에서 피난선을 타고 여수에 내려 순천에서 피난 살았다. 여주에 국유림을 벌채해 마을을 만들 터이니 연백 사람들은 모이라는 소식을 듣고 여주로 이사했다. 연백 사람들이 모여서 짭조름한 갯내음을 그리워하며 고수를 듬뿍 넣은 짠지를 담아 먹고 연백 말을 하며 살았다.

어릴 적에 밤마다 들었던 연백의 너른 논, 갯벌에서 잡으면 널빤지로 짓눌러두고 회로 먹었다는 짭조름한 대합도 먹어보고 본 듯 선하다. 몇 년 후에나 가볼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나고 북에 남겨진 이모가 몰래 숨었다가 탈출했다는 무인도 절벽에서는 밤마다 숨어서 랜턴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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