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아영-시를 읽으면서 나를 되돌아본다는 뜻입니다
귀 닳은 주걱
- 박홍재
급하게 외출하는 아내를 대신하여
서투른 설거지를 오랜만에 하는 시간
귀 닳아 오래된 주걱 손에 들고 멈칫 섰다
대문을 나서면서 당부하던 아내 모습
뒤태가 마침맞게 귀가 닮은 주걱 같다
태연히 감췄던 웃음 설핏하게 스친다
젓가락 숟가락과 물에 잠긴 밥그릇이
막연히 올려보는 내 모습 보는 것 같다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밥을 푸던 천사를
- 차마 거룩한 근성
‘밥심으로 산다’는 말도 힘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요? 요즘은 밥솥 없는 가정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아요. 신혼 가전제품에 밥솥이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1인 가구의 증가, 바쁜 생활 덕분에 즉석밥을 잔뜩 사다 놓고 먹는 게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보태어, 다양한 서양 음식의 유입으로 밥이 최선은 아닌 시대가 되었어요.
이처럼, 뚜렷하게 구분 지었던 부부의 역할도 많이 바뀌었지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이나 날 것 같았던 시절은 진작에 유물이 되었고, 멀었던 역할의 거리도 경계가 불분명해졌습니다. 부부로 살면서도 생각은 어긋난 채 감았던 시간이 쌓이면서, “뒤태가 마침맞게 귀가 닮은 주걱 같”은 아내를 보게 되는 순간도 만나게 되네요. “서투른 설거지를 오랜만에” 해 보면서요. 묵묵히 밥을 푸던 주걱을 씻으며, 아내를 향한 깊은 존경을 끝끝내 뽑아냅니다. “태연히 감췄던 웃음”을 세제 거품처럼 퐁퐁 일으키면서요.
매일 도는 쳇바퀴에 허기진 발걸음으로 삼각김밥 하나 사려던 어느 오후의 편의점에서, 턱 밑으로 보던 주걱이 문득 아내로 떠오른다면 헌신의 맛을 알게 되는 걸까요? 내 마음에 걸터앉아 손 흔드는 사랑을 알게 되는 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