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납 제련공장 반대운동의 성과와 의미
3년 끌어온 싸움… 자발적 연대가 이룬 환경권 수호
낮은 행정, 높은 시민의식… 법과 제도의 허점 드러나
‘불허는 끝이 아니라 시작’… 대책위의 3대 요구
이제는 제도 개선…시민이 이끄는 지속가능한 도시로
영주시 적서동 농공단지에 추진되던 납폐기물 제련공장 설립이 결국 무산됐다.
유정근 시장권한대행은 지난 9일 오후 4시 공식 입장문을 통해 “시민 건강과 공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설립 승인 요청을 불허한다”고 밝혔다. 지난 2022년 첫 논란 이후 3년 넘게 이어진 시민사회의 반대 목소리가 결국 행정을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니다. 시민사회는 “이번 결정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제도 개선과 공공감시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 ‘사상 유례없는 시민운동’, 시민이 스스로 쓴 지역 민주주의
이번 납공장 반대운동은 단순한 환경 이슈를 넘어, 대한민국 지방자치사에서 보기 드문 시민 주도형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단체가 아닌 시민 개개인이 움직였고, 특정 정당이 아닌 지역 사회 전체가 연대한 모양새였다.
시민들은 총 3차례에 걸친 대규모 궐기대회와 1인 시위, 릴레이 단식과 침묵시위, 수만 명이 참여한 반대 서명운동을 자발적으로 이어왔다. 아침이면 시청 앞에는 늘 피켓을 든 시민들이 자리를 지켰고, 밤이면 2천 60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자고 나면 수백개의 의견이 달릴 정도다.
스스로 현수막을 내다 걸고 반대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제작해 아파트 단지 등에 게시하는가 하면 거리 서명운동까지 펼쳐지면서 3만 명이 넘는 시민서명을 받아냈다.
학생과 학부모, 농민, 종교인, 청년, 노인,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직업도 세대도 다른 이들이 ‘생명’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함께 싸웠다. 일부 시민은 생업을 뒤로 한 채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지역 언론과 유튜브 방송이 매일 현장을 기록했다.
이번 사안은 특정 단체의 조직력이 아닌, “시민의 자발성 그 자체”가 만들어낸 승리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전국적으로도 유례없는 자발적 시민 연대의 힘으로 이뤄낸 사례다.
▲ ‘낮은 행정, 고도의 시민의식’
2022년, 납공장 사업자 ㈜바이원은 공장설립 승인 없이 건축허가를 먼저 받은 상태였다. 영주시는 소송에서 대법원까지 가는 과정에서 허점을 드러냈고, 일부 공무원이 업체와 수백 차례 통화하며 서류를 묵인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이에 대해 대책위는 “이 사안은 단순한 민원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사회 구조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환경부가 최근 회신을 통해 “EPA AP-42 배출계수 적용이 타당하다”고 밝히면서 시민 주장이 과학적으로도 입증됐다.
그동안 대책위는 직접 질의서를 작성해 환경부로부터 답변을 이끌어냈고, 관련 법령과 지침을 분석하며 설립 승인에 대한 반박 논리를 마련했다. 이는 전문가가 아닌 시민이 주도한 지식 기반 행동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드문 사례다.
▲ 납공장 불허 입장문, ‘시민이 주인인 행정’의 이정표 세워
유정근 시장권한 대행이 지난 9일 직접 발표한 납폐기물 제련공장 설립 불허 공식 입장문은 단순한 행정 결정이 아니라,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 가치로 인정한 역사적 선언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번 입장문은 행정이 시민의 뜻을 외면하지 않고 경청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영주 시민사회가 만들어낸 유례없는 자발적 시민 행동에 대한 응답이자 존중의 표현이다. 특히 “공익을 위해 승인 요청을 불허한다”는 문장은 단호하면서도 책임 있는 행정의 자세를 드러냈다.
시민들은 그동안 거리에서, 시청 앞에서, 집회와 단식으로 목소리를 내 왔다. 시는 이들의 움직임을 형식적인 민원으로 취급하지 않고, 정당한 공론의 결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지방행정이 시민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결정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이번 입장문은 단순한 정책 결정이 아니라, ‘시민이 정책의 최종 결정권자’임을 선언한 문서이기도 하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정 책임이 시민과의 연대로 완성된 순간이다.
한 시민은 “정치가 아닌 생명의 문제였고, 행정이 결국 올바른 편에 섰다는 점에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번 결정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향후 법적 대응과 제도 개선에서도 이러한 철학이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시민은 이번 입장문을 단순한 ‘불허 통보서’가 아니라, 영주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사회적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감사합니다” 외친 시청 안팎… 눈물과 박수 쏟아져
불허 발표가 나온 9일 오후, 시청은 뜨거운 박수와 눈물로 가득 찼다.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서로를 끌어안은 시민들, 단식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안아주며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한 시민들 등 감격의 현장이었다.
이날 불허 발표 자리에는 전풍림 시의회납공장대책위원장이 울컥하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도 포착됐다. 시민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시의회에서 역할을 해 온 그는 “불허 결정에 울컥했고, 시민들의 환호에 또 울컥했다”며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궐기대회 1차부터 3차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MC안태진 씨도 “시민들이 스스로 해낸 시민승리”라며 환하게 웃었다.
시청 앞 단식을 주도해온 윤재현 목사는 “이번 사태는 단순한 공장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며 “환경 유해 시설에 대한 제도적 공백과 주민 참여 절차의 부재가 낳은 구조적 결함”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공청회를 의무화하고 대면 질의응답, 정보공개 등 실질적인 주민 참여가 법제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번에도 사업자의 법적 대응 가능성이 열려 있는 만큼 공익적 감시와 대응을 강화해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현장에는 임종득 국회의원(국민의힘)·임미애 국회의원(민주당), 박규환 민주당 지역위원장 등 정치권도 함께했다.
▲ “불허는 끝이 아니다”… 대책위, 시에 3대 조치 요구
영주시의 납폐기물 제련공장 설립 불허 결정이 발표되자, 대책위는 즉각 “이번 결정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며 세 가지 핵심 조치를 영주시에 공식 요구했다.
첫째는 불허 처분의 법적 사유 공개다. 대책위는 “영주시가 어떤 법적 근거와 판단으로 불허를 결정했는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향후 업체 측이 제기할 수 있는 행정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책위는 “시민과 함께 공동 대응 체계를 구축하자”고도 제안했다.
둘째는 허위자료 기반 허가의 직권취소다. 환경부가 최근 회신을 통해 “EPA AP-42 배출계수 적용이 타당하다”고 밝히면서, 기존에 업체가 제출한 자료가 부적절했음이 확인됐다는 게 대책위의 주장이다. 이에 따라 기존에 발급된 대기배출시설 설치 허가와 건축허가 모두가 허위 자료에 기반했으므로 즉시 직권취소돼야 한다고 밝혔다.
셋째는 외부 감사 도입이다. 대책위는 “영주시 공무원이 업체와 280여 차례 통화하고, 허위 서류를 묵인한 정황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며 “이는 행정 절차의 중대한 문제로, 외부 인사를 포함한 독립적 감사를 통해 실체를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책위는 “이번 불허 결정이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환영하지만, 제도 개선과 책임 규명 없이는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며, 향후에도 감시와 대응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 정치권과 언론, 그 뒤를 따르다
이번 시민운동은 정치권과 언론도 움직였다. 임종득 국회의원(국민의힘)은 “졸속 행정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고, 더불어민주당 경북도당은 “시민의 승리이자 책임 있는 행정의 본보기”라고 논평했다. 불허 결정의 핵심 근거가 됐던 ‘EPA AP-42 배출계수 적용이 타당하다’는 환경부의 입장을 얻어내는데 큰 역할을 한 서영교 국회의원은 이날 국회기자회견을 통해 “정치인이기 전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시민으로서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며 “국회가 시민 목소리에 응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시의회 역시 특위를 꾸려 현장 의견을 청취하고 오픈 토론회를 여는 등 의회의 역할을 수행했다. 언론도 납공장 이슈를 단순 보도가 아닌 지역 현안으로 다루며 깊이 있게 다뤘다. 시민과 언론, 정치가 함께한 드문 장면이었다.
▲ 시민이 만든 도시, 시민이 지켜낼 도시
이번 결정을 계기로 영주는 “시민이 주인이 되는 도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작은 시골 도시의 시민들이 오랜 시간 버티고, 외쳤고, 설득해 결국 공장 설립을 막아낸 것이다.
이제는 제도 개선이 과제로 남았다. 시민들은 “앞으로 모든 환경유해시설에 대해 주민참여 절차와 정보공개가 제도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공공갈등을 방지하기 위한 공론화 절차 의무화, 지자체 사전고지 제도, 환경영향평가 투명성 확보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 생명을 지킨 도시, 희망을 이어갈 시민
대책위는 “단식은 끝났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행정소송과 제도 개선 운동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유정근 영주시장 권한대행은 “영주는 생명을 지켜낸 도시로 기억돼야 한다.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이 싸움은 한 공장 반대를 넘었다. 그것은 곧 한 도시가 스스로 깨어났다는 증거였고, 주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과정이었다. 영주의 이름은 한국 시민운동사에 오래도록 남게 될 것이다.
오공환 기자·이영선 기자·심남주 기자(영상P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