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 이야기

납 공장 반대 시위 현장
납 공장 반대 시위 현장

지난주에 이어 또 납 이야기를 꺼내는 건 우리 지역의 환경과 보건에 심각한 위협이 될 납 공장 가동의 중차대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행정이나 정치하는 이들이 제대로 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채로 시민들이 폭염 속에 시위 현장으로 내몰리는 지역의 암울한 현실 때문이다.

지난 칼럼이 금속의 역사와 중금속 중독의 위험성에 대해 무겁게 쓴 것이라면,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 속의 납 이야기를 다소 가볍게 써보려고 한다. 영어의 관용어에 아주 무거운 걸 말할 때 ‘납처럼 무겁다(as heavy as lead)’라고 한다. 가벼운 에피소드일지 모르지만 오늘의 우리 지역인들에게 어찌 가벼울 수만 있겠는가?

어린 시절, “다 때워요, 때~앰”하는 소리와 함께 마을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땜장이라고 불렀다. 냄비나 주전자를 오래 써 구멍이 나면 그냥 버리고 선뜻 새 걸 장만할 수 없던 궁색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땜장이가 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고 앉아 지고 온 화로를 내려놓고 숯불을 피울 즈음이면 동네 아낙들이 구멍 난 냄비나 주전자, 세숫대야 등속을 들고 하나둘 모여든다.

땜장이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인두를 화로에 달궈 납과 주석을 녹여 구멍을 메우고 망치로 두드려 감쪽같이 매끈하게 만들어 준다. 이른바 ‘납땜’이라는 게 완성된 것이다. 납을 제련하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몸에 해롭기는 했으련만 구멍을 때웠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해하던 시절이었다.

유럽에서 땅 밑으로 깔기 시작한 최초의 수도관은 납으로 만든 것이었다. 납의 유해성이 드러난 뒤 대부분 교체되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하는 지역들도 있다고 한다. 몇 해 전, 베토벤 사후(死後)의 머리카락에서 정상인의 95배에 달하는 납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가 청력을 잃은 이유가 납 중독 때문일 걸로 추론하는 기사였다. 납 수도관의 탓일 수도 있고, 그가 즐겨 마신 와인에 감미료로 사용된 아세트산(酸) 납 때문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가 휘발유 하면 얼핏 떠올리게 되는 빛깔은 붉은색일 것이다. 우리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자동차에 넣던 연료였다. 노킹(knocking)이란 자동차의 내연기관에서 연료가 비정상적으로 연소되면서 마치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 그 노킹 현상을 막기 위해 납을 첨가해야 했다. 납의 심각한 유해성이 공론화하면서 납 대신 산소 화합물로 대체하게 되었다. 주유를 하다 보면 주유기에 ‘unleaded’라는 표시를 볼 수 있다. 납이 들어가지 않은 ‘무연(無鉛) 휘발유’라는 얘기다. 빛깔도 붉은색이 아니라 연녹색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지난해 작고한 신경림 시인의 <목계 장터>의 한 대목이다. 박가분은 1916년, 우리나라 최초로 회사에서 제조한 화장품이었다. 지금의 두산그룹의 원조인 박승직이라는 이가 만들었다고 해서 ‘박가분(朴家粉)’이 되었다.

납 성분이 들어 있던 박가분은 요즘의 방문판매 격인 방물장수들에 의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하루에 만 갑 이상 팔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쯤 후, 납 성분이 해롭다는 게 알려지면서 박가분은 시장에서 퇴출되고 그 이후에 나온 화장품들에는 ‘절대 납이 들어 있지 않음’이라는 문구가 상표에 적혀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구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들 사이에서는 잇꽃(홍화, 紅花) 추출물이나 도자기의 붉은 색을 내는 데 쓰이는 안료인 진사(辰沙)를 입술에 발랐으니 그들은 몰랐겠지만 수은이나 납 중독의 병증으로 시름시름 앓았을지도 모른다. 기방(妓房)을 자주 찾은 남정네들도 예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립스틱의 삼분의 일은 여자가 먹고 또 삼분의 일은 휴지가 먹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남자가 먹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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