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푸른 자유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서둘러 먹은 마음이었다. 순전히 여름철의 여행을 꺼려온 내 오랜 버릇 때문이었다. 두 가지 성향의 여행자들이 있다. 그 하나는 행선지와 들릴 곳, 먹을 곳, 잘 곳을 시간대별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편, 또 하나는 그냥 무작정 떠나고 보는 여행자다. 나는 주로 후자에 속하는 편이다. 여행이란 낯섬과 자유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고독까지 보태지면 그야말로 최상의 여행이 된다.
인생은 산마루에서 돌을 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의 섬 여행도 그랬다. 남쪽 바다의 비진도를 가볼 계획으로 떠났지만 배편이 여의치 않아 행선을 바꾸어야 했다.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는 욕지도행 연락선에 몸을 실은 건 전적으로 고등어 회에 대한 탐닉 때문이었다. 내륙에서 고등어를 회로 맛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곳이 남쪽 바다에서도 가장 유명한 고등어의 산지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 보다/ 소금에 절여 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구이를 먹을 수 있네’ 잘 알려진 김창완의 노래 <어머니와 고등어>에도 나오듯 예로부터 고등어는 우리 밥상에 가장 흔히 오르던 생선이었다.
어린 시절의 장날 해 질 무렵이면 집 앞 신작로에 나와 앉아 장터에서 돌아오는 어른들을 구경하곤 했었다. 읍내 나무전 골목에서 여러 잔 걸쳐 거나해진 어른들이 비틀걸음으로 식솔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손에는 거의 어김없이 새끼로 묶은 고등어 한 손이 들려 있었다. ‘손’이란 지금은 사라진 옛말이 되었지만 생선 두 마리를 이르던 단위였다. 아무리 궁색한 살림살이에도 아버지의 밥상에는 꼭 비린 것이 올랐는데 바로 고등어자반이었다.
고등어가 본격적으로 우리 밥상에 오르기 시작한 게 1950년대, 영주와 철암을 잇는 영암선이 개통된 이후부터였다.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에 지나던 옛 어물전에는 묵호에서 밤새 달려온 고등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소금을 친 고등어들을 실은 트럭들이 내륙 각지로 떠나고 있었다. 육로(陸路)라고 해봐야 먼지 풀풀 날리던 좁은 신작로가 전부이던 시절 철도가 가장 효율적인 운송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웃 안동에서는 영덕에서 잡힌 고등어를 지게로 안동까지 져 나른 것이 간고등어의 시작이었다는 스토리텔링으로 ‘안동 간고등어’는 대체 불가의 브렌드가 되었다. 영리한 마케팅의 결과물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사실 경북 내륙의 대부분의 간고등어는 묵호에서 철도로 영주에 당도한 것들이었다.
다시 고등어 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회는 크게 흰 살 생선과 붉은 살 생선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내륙에서 회로 먹을 수 있는 건 광어, 도다리, 우럭 등 흰 살 생선들이다. DHA, 오메가―3,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하다는 등 푸른 생선들의 살은 붉은색이다.
이놈들은 부레가 없어서 잡히자마자 금방 죽어버려 그만큼 부패도 빨리 진행되므로 참치처럼 냉동시키거나 고등어처럼 소금을 뿌려 염장을 하는 게 보통이다. 내가 해마다 봄철이면 동해 북쪽 바다를 찾는 것은 역시 등 푸른 생선인 꽁치회 때문이다. 등 푸른 생선들은 대개가 비리다. 그 회들은 산지에서 바로 잡혀 감칠맛이 비린 맛을 제압할 때만 별미가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죽고 못 사는 ‘시메사바’는 식초에 절여 비린 맛을 잡은 고등어회다. 사바는 고등어를 말하고 시메는 절이다라는 말에서 왔다. 그들에게도 귀한 것이라 뇌물로도 바쳤다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사바사바’가 거기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 글의 제목으로 뽑은 ‘등 푸른 자유’는 공지영의 소설 <고등어>의 첫 장에 인용한 정종목의 시 <생선>의 한 대목에서 온 것이다. ‘한때 넉넉한 바다를 익명으로 떠돌 적에/ 아직 그것은 등이 푸른 자유였다’ 이른바 운동권으로 청춘을 건너온 남녀의 후일담이라 할 공지영의 그 소설의 한 대목을 마무리로 써본다. ‘하지만 석쇠에 구워질 때쯤 그들은 생각할지도 모르지. 나는 왜 한때 그 바닷속을, 대체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헤엄쳐 다녔을까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