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돌아온 화가, 자연에 붓을 담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무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편집자 주>

수도권보다 고향에서 더 오래 머문다… 영주에 작업실 마련

고 2 늦깎이 시작, 홍익대 박사까지… 그림에 빠진 열정의 여정

 

밭일하며 흙과 풀 만지고 자연과 호흡… 그림에도 녹아 들어

자연과 명상, 노자·장자 사상까지 그림 속 철학으로 피워내

영주 선비매화원에서(2025년 3월11일)
영주 선비매화원에서(2025년 3월11일)

신현대 박사는 귀향 중이다. ‘귀향 중’이라 말한 건 아직 집이 수도권인 일산에 있지만 평소에는 고향에서 보내는 중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수도권에서 하는 작품 전시 기간에 수도권 집에 있기도 하지만 그는 영주 작업실에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는 주말이면 수도권 집에 가는 주말 부부이다. 그의 태생지는 봉화 물야이다.

아직 그가 태어난 터전은 그대로 있고 농사지을 텃밭도 있다. 농작물을 만지고 풀을 만지며 아침과 저녁의 시간을 느끼며 자연과 자신의 합일을 작품에 표현하는 신화백, 주말이면 일산 집에 가는 애처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LG그룹 등 기업, 주한 외국대사관, 학교와 개인들에 의해 소장되고 있으며 농협 등의 캘린더에도 실렸다.

신박사는 5.24(토) 부터 6.5(목)까지 인근 안동에 있는 아트89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개인전 준비 관계로 바쁜 신현대 화백과 인터뷰했다.

신박사, 바쁘신 일정에 인터뷰 요청했습니다.

별말씀을요. 6월 5일까지 안동 웅부공원 건너 삼산우체국 옆 전시실(아트89)에서 전시를 합니다. 거기 전시 준비 마무리하다 보니 바빴습니다.

개인전인가요? 개인전만 해도 여러 번 여신 걸로 압니다.

네. 개인전입니다. 지금까지 23회 개인전을 했습니다. 단체전은 숫자를 모르겠습니다. 매우 많습니다(함께 웃음).

개인전은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지요?

그럼요. 개인전은 자기를 다 보여주는 전시라 하겠습니다. 전시 공간 탐색, 그림 주제 선정, 캔버스 사이즈, 디자인물, 배치 등등 모두 신경 써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공간이니 말입니다. 개인전이 아니라면 신경이 덜 쓰이고요.

개인전을 주로 어디서 하나요?

개인전은 거의 매년 합니다. 지난해는 두 번을 했고 금년은 세 번이 잡혀 있습니다. 국제 전시회도 하는데 금년은 대만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대만 일정이 변경되어 안동 전시회를 먼저 하기로 해 매화를 주제로 안동전시회를 5월 24일(토)부터 열흘간 합니다.

저도 시간 내어 가보겠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전시회 오신다니 감사합니다. 저는 봉화의 물야면 수식에서 태어났습니다. 수식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6학년 때 영주로 와서 영주동부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대영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은빛세상(영주호)
은빛세상(영주호)

그림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친구들에 비해 저는 그림을 좀 늦게 시작했습니다. 선배들이 미술반 활동을 할 사람을 찾으면 손도 들지 못했습니다. 제가 스스로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거던요(함께 웃음). 그러다 그림 그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 영광고 2학년 5월이던가 제가 미술실로 찾아갔습니다. 미술반 활동을 하던 한 학년 위의 송재진 선배님이 반가이 맞아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때 ‘왠 놈이야?’ 이런 식이었으면 도망했을 것 같습니다(함께 웃음). 송재진 선배가 당시 스승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땐 적극적이셨군요(함께 웃음). 미술로의 진로를 부모님이 찬성하셨나요?

아버지는 이미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었고요. 제가 영주로 온 것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몇 년 후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진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야단도 치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알아서 하도록 맡겨두셨습니다.

다른 형제분들은 무어라 하지 않았나요?

저는 7남매 중 중간인데 위로 누나 셋 아래로 여동생 셋입니다. 제게 간섭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외동아들이시군요.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않으셨나요?

글쎄요. 아무래도 그러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합니다. 특히 어릴 때 아버지가 어딜 가시면 저를 데리고 다니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를 귀여워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친구들은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데 저는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다니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벌판에 혼자 서 있으면서 ‘왜 갑자기 사라지셨지?’란 느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저만을 귀하게 여기신다든지 그런 내색을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커 가면서 ‘어머니가 대단하셨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을 듣지 않게 행동해라.’는 당부를 자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농사지으시던 과수원을 홀로 또 일꾼들을 고용해 농사지으면서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 다 키우셨습니다. 과수원 농사를 잘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농사로 고생하셨겠지만, 덕분에 저희 7남매는 크게 고생하지 않고 컸지 않나 생각합니다.

모친께서 자식들 건사하고 과수원 농사도 하고 슈퍼우먼이셨네요.

아버지가 둘째 아들인데 할머니는 늘 우리 집에 계셨습니다. 어린 저희 건사는 할머니가 많이 하셨지요. 저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소심하단 말을 들었고 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태어나 살던 수식리는 저희 평산 신가 집성촌으로 마을 또래가 셋이었는데 한 친구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그 친구가 상을 타면 부러웠고요. 저는 그림으로 칭찬을 받는다든지 선발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썰매도 사 주시곤 하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곤 제가 혼자 만들곤 했습니다. 만드는 게 좋았습니다.

어머니 모시고 바닷가에서
어머니 모시고 바닷가에서

만들기도 좋아하시고.. 어릴 때부터 소질을 보이긴 하셨군요(함께 웃음).

중학교 때 진학 관계로 선생님을 만날 때 농고를 가고 싶다 했습니다. 동물 키우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어머니 모시고 오라 하셨는데 어머니가 대학을 보내고 싶다 하셔서 인문계인 영광고로 진학했습니다. 거기서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고요. 대학은 뜻하지 않게 재수를 하게 되었는데 열심히 그림 그리다 보니 홍익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홍대에서 미술학 박사학위까지 받으시고 후진 양성과 작품 활동을 지금까지 하시는군요?

네. 대학 강의는 홍대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서 했습니다. 대학이 아닌 단체의 요청으로 여러 곳에서 강의했고요.

요즘엔 주로 어디 계시나요? 주 거주지 기준으로.

요즘엔 주로 시골에 있습니다. 작업실은 영주에 있고요. 시골에서 어머니 모시고 있다가 어머니 몸이 안 좋아지시면서 누님 댁에 가 계시고 홀로 텃밭 농사도 하고 작업실에 가서 그림도 그리고 합니다. 시골집에는 선비를 상징하는 국화도 심고, 매화도 키우고, 대나무도 심고, 연못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서울 집에는?

서울이 아니고 일산에 집이 있습니다. 금요일 일산 집에 가는 주말부부라 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 있을 때가 시간상으로 더 깁니다. 이제 거의 귀향했다고 생각되는 정도입니다. 전시회 있으면 주말에도 일산 집에 못 가고...

매하무동(친구들과 인사동에서 어울리며)
매하무동(친구들과 인사동에서 어울리며)

시골에 와서 작품 활동도 하고 재경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하시고?

서울에서 있는 고향 모임은 가능하면 참석했습니다. 희여골 출신의 수필가 황태영이 친구였거든요. 황태영과 같이 인사동에서 친구들과 만나 노는 것이 좋아서 소주병, 맥주병, 매화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황태영이 살아있을 땐 그를 통해 고향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모임에 많이 참석했습니다. 또 영주동부초, 대영중, 영광고 동창 모임에 계속 나갔고요.

시골에서의 작품 활동이 작품에도 영향을 미치겠군요?

시골에 있는 게 작업하는 데 많이 도움도 되더라고요. 예전에도 자연을 소재로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스치며 지나는 그런 자연 또는 보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 속에 살며 온몸으로 느끼는 자연을 그리게 됩니다. 피상적 굴레를 벗어나 손으로 만지는 흙의 느낌, 풀의 감촉, 꽃의 향기, 새벽의 느낌, 저녁의 느낌... 자연과 하나된 그런 그림을 표현하려고 하게 됩니다.

제가 15년 전 명상을 시작했는데 자연 속에 살며 하는 명상도 작품 구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자연의 흐름 속에 맡겨두는 걸 표현하고... 제가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신현대 박사 프로필>

봉화 수식초(1~5), 영주동부초 졸업, 대영중, 영광고

홍익대 동양화 졸업 및 미술대학원 동양화(미술학 박사)

- 홍익대 및 홍대 대학원 겸임교수를 비롯 여러 대학 강의

-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등 각종 대회 심사위원으로 참가

- 개인전: 현재까지 총 23회 개인전

  (현재 안동시 아트89에서 개인전 전시 중: 5.24~6.5)

- 아트페어: 총 17회 국내외 아트페어 참가

- 작품 소장처: LG그룹 등 기업, 주한 함브르크대사관 등

  주한 외교관, 영광고 등 학교, 국내외 개인 소장

- 카렌다: 농협, 대우인터네셔날 등

- 수상: 제3회 춘추미술상, 제9회 경인 미술대전 「특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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