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 길 달리던 순흥 소년, 세상에 없는 기계를 만들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무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편집자 주>

초등학교 입학도 늦게, 십리 길을 9년간 뛰어다닌 순흥 소년

청계천 중고서점에서 기계책 찾아 밤마다 실험한 청년 시절

 

세계 유일의 기계를 만든 기술자, 공장마다 그가 만든 기계

호수 옆 형님 위한 귀향 펜션, 고향에 묵어가는 선비마을 꿈꿔

권화집 사장
권화집 사장

권화집 일성산업 대표는 중학교 졸업 후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989년 은박용기 금형 제작업체인 일성정밀(현 일성IND(주))을 창업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가 만든 회사는 늘 개발의 연속이었다.

은박 베이킹컵, 은박 도시락, 은박 쿠킹호일, 가정용 랩, 김밥 및 제과용 도시락 용기, 라면 자판기용 은박 용기, 종이호일, 종이 베이킹컵, 머핀컵, 은박 소주컵과 맥주컵 등을 만드는 기계를 자체 개발해 제품을 생산하고 그 기계를 수출까지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ISO 국제 인증 취득 및 각종 발명특허, 디자인특허를 취득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랑할 게 없다고 손사래 쳤다. 다들 어렵게 살았기에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지 않는 그였다..

애향인 코너는 고향 사랑하는 분들 찾아 이야기 나누는 코너입니다. 형제분이 어떻게 되나요?

현재 형님이 순흥에 계시고 사촌이 영주 시내에 삽니다. 저희는 5남 1녀입니다. 제가 남자로는 셋째입니다. 다들 객지에 일하러 일찍 나갔고 큰형님도 울산에 계시다 퇴직 후 순흥면 배점으로 귀향하셨습니다.

배점에서 태어나 자라셨나요?

아닙니다. 태장리 한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산 하나를 넘으면 풍기읍 욱금리이고 또 다른 산 하나를 넘으면 배점인 곳이었습니다. 배점 죽계호 옆에 집을 하나 지었습니다. 형님이 은퇴하시면 돌아오셔서 숙박업도 좀 하시게... 이름은 ‘호수펜션’입니다.

큰형님의 은퇴 후 귀향 사업도 준비해 드리셨군요?

큰형님은 울산의 회사에 다니시다 퇴직하셨습니다. 형님이 귀향하시니 좋습니다. 형제자매들이 대부분 수도권에 있는지라 명절이나 제사에 먼 거리의 울산이 아닌 가까운 거리의 고향 순흥에 갈 수 있으니까요. 제사를 부모님의 산소가 있는 고향에서 지낼 수 있으니 좋고요.

형제자매도 많고.. 많이 힘들던 시절이었지요?

아이구.. 우리만 힘들었나요. 다들 힘들던 시절이었지요. 사실 중학교도 간신히 나왔습니다. 순흥초등학교 나오고 소수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교까지 10리 길이었습니다. 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고 신작로에 나와서도 학교까지 한참 걸렸습니다. 9년을 거의 뛰다시피 다녔습니다. 다들 그렇게 뛰었습니다. 저는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취학통지서가 나왔는데 늦게 보냈나요?

제가 호적상 4살이 작습니다. 한두 살 늦은 친구들은 있는데 저는 4살 늦게 출생 신고되었습니다. 그러니 취학통지도 안 나왔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학교 갔더니 호적상 5살이었지만 교장 선생님이 실제 보니 5살은 아닌지라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태권도인 김신호 박사와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입니다.

공식 출생 연도가 실제 나이와 다른 사람이 많던 시절인데 4년이나 늦는 경우는 드문데요.

어릴 때 죽는 아이들이 있던 시절인지라 출생신고 자체를 늦게 하셨나 봅니다.

순흥에는 고등학교가 없는데 고등학교는 영주 시내로 진학하셨나요?

야간 고등학교 들어갔는데 집안 형편도 어렵고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큰형님은 광산에 다니셨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다 하다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이라.. 힘들지 않으셨나요?

그땐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여럿 있었습니다. 저만의 스토리도 아니고... 가출이 아니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서울 문래동 공장을 다녔습니다. 공장에 들어가 심부름도 하고 물건 만드는 걸 보면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청계천 중고서적 가게에 가서 기술 서적을 보았습니다.

그 뒤 일하면서 잘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밤에 청계천을 찾기도 하고 다들 퇴근한 밤에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보며 기계 만드는 걸 생각하고... 제가 기계 만드는 걸 좋아했거든요. 지금도 새로운 걸 만드는 아이디어가 생기면 실험합니다. 아들이 경영을 하고 있고 저는 이제 70 넘어 직접 만들지는 않고 만들어 보라고 합니다.

본사 및 공장 전경
본사 및 공장 전경

세상에 없는 새로운 걸 만드셨다는 건데.. 대단합니다.

제가 개발한 기계들, 세계 다른 곳에는 없는 기계가 공장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특허받은 것도 있고 굳이 특허를 받지 않은 것도 있고요. 이렇게 만든 기계에서 나오는 제품들을 시장에 출하하고 제 기계에서 만든 제품들을 시장에서 보면 뿌듯하고 또 새 아이디어를 생각하고요. 새로운 기계를 만들기 위해 다른 나라에도 갔습니다. 새 기계 만들기에 빠져서인지 한 번 보고 시도하고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만들었습니다. 제 능력상 회사를 크게 키우지는 못했지만...

주로 어떤 기계 발명인가요?

저희가 하는 건 호일 같은 가정용 제품 만드는 기계도 있고 SPC등 회사에서 제빵할 때 쓰는 용기 같은 걸 만드는 기계입니다.

당시 청계천에 중고서적점들이 쭉 있던 시절이군요. 당시 평화시장 의류 공장이 많았는데 초등학교만 마치고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때는 그런 사람이 많았지요, 제 모교 순흥초등학교 같이 다닌 친구들도 반 정도는 중학교 진학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 역경 상황에서도 바르게 크고 혼자 힘으로 계속 공부해 스스로를 성장시킨 친구 김신호 교수는 인간 승리이지요.

친구 이야기는 그만하시고요(함께 웃음). 창업은 어떻게 하시려고 했나요?

영등포 문래동 공장에서 나름 기술자로 인정받았는데 새로운 기계를 제 마음대로 만들어 그 기계로 제품을 생산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어요. 당시 결혼해서 아기도 있고 교사 월급 두 배 정도 받았지만 제가 만든 기계로 제품을 생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88년도에 왕십리에 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화성에 회사가 있습니다.

기계 개발을 위해 또 기계와 제품을 팔려고 외국 출장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외국에 많이 나갔지요. 저는 주로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인도 등에 자주 갔습니다. 약 15년 정도를 외국에 자주 갔습니다. 어떤 땐 6개월을 나가 있기도 했습니다. 외국에 기계를 팔아 설치하면 20일 정도 체류하며 시험 가동도 해 주고...

영어를 잘하셨나 봅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 어떻나요. 영어를 못해도 소통할 수 있잖아요. 용어들을 중심으로 말하면 소통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기계를 수출했는데 이젠 중국산이 많아졌어요. 우리가 기술을 개발해도 중국이 금방 쫒아오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일을 잘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친구분들은 대부분 은퇴하셨지요? 카톡 사진을 보니 손자손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더군요. 회사 경영은 언제까지 하시려고요?

회사는 아들이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아들이 지금 40대입니다. 공대와 공대 대학원을 나오고 3년 정도 취직했다가 저와 같이 일합니다. 지금 대표이고 잘하고 있습니다. 제 아들은 결혼해 아이 셋입니다. 딸은 삼성반도체 연구원으로 있다가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고 있고요.

결혼 40주년기념 가족사진
결혼 40주년기념 가족사진

애국 가족입니다(함께 웃음). 영주 출신 출향인들 모임도 하셨지요?

예. 한의원을 하는 김영동 원장도 함께하는 모임입니다. 지금은 연로하셔서 활동이 뜸한 영주 출신 원로들 모시고 운동도 하는 모임의 회장을 몇 년 했습니다.

카톡 사진을 보니 부인과 같이 운동하고 여행한 사진이 보이더군요.

저는 집사람과 골프도 같이 다니고 여행도 합니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더군요. 시간만 나면 같이 다닙니다. 어쩌면 고생만 하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인지도 모르겠어요.

기사를 보니 어려운 이웃을 위해 1억을 기부하셨던데요. 어려운 친구들도 도우셨고요.

고생이 참 많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였습니다. 제가 여유 있을 때 어려운 이웃들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찾았습니다. 어려운 친구 도운 건 말하면 안 되는데... 약을 사라고 돈을 건네기도 했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이었어요.

고향 사람들 또는 고향 공직자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제가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들렸다가 그냥 가지 않고 묵어갈 수 있는 선비마을을 만든다든가.. 초등학교라도 도시에서 유학을 올 수 있다든가... 또 출향인들이 올 계기가 되는 이벤트를 연다든가... 또 고향에 갔는데 외지에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지인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계기가 있으면 좋겠고...

사랑의 열매 1억 기부 때
사랑의 열매 1억 기부 때

<권화집 대표 프로필>

- 순흥초등학교

- 소수중학교

- 중학교 졸업 후 영등포 문래동 공장 취업

- 1989년 일성정밀 창업(현 일성IND(주)로

   2015년 경기도 화성으로 본사 이전 및 공장 확충)

- (현) 일성산업 대표

- (전) 영지회(한성cc 영주 향우 골프 동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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