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군경에 불법 살해…국가 책임"
수복 직후 마을 돌아왔다 총 맞고 숨진 황모씨
좌익 누명 씌워 끌려간 박모씨, 구수골서 총살
부농 출신 정모씨, 정치혐의 뒤 야산서 피살돼

우리고장 영주에서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해 민간인이 불법으로 집단 희생된 사건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군경이 좌익 혐의 또는 인민군 협력 혐의로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고 처형한 정황이 밝혀진 가운데, 이들 중에는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평범한 농민과 마을 유지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최근 발표한 2024하반기 조사보고서에서 “영주시 이산면과 봉현면 등에서 좌익 혐의나 인민군 협조 혐의 등으로 연행된 비무장 민간인 4명이 정식 재판이나 적법 절차 없이 경찰과 국군 등에 의해 불법 살해됐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박모씨(하망동), 김모씨(이산면 석포리), 정모씨(상줄동), 황모씨(봉현면 대촌리)씨로 모두 20~30대 남성들이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6년부터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사이에 영주 일대에서 연행돼 솔밭, 야산, 마을 부근 등 외진 장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황모씨(1928년생)는 영주 봉현면 대촌1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주민이다. 그는 전쟁 초기 인민군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 징집됐다가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1950년 음력 8월쯤 뒷산에 밤을 따러 갔다 군경에 붙잡혔다. 군경은 황씨의 깎은 머리를 보고 ‘빨갱이’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일렬로 세운 뒤 총살을 시도했고, 황씨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기절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며칠간 피를 흘리다 결국 숨졌다.

박모씨(1916년생)는 영주 하망5리 원당마을에서 구장으로 일하며 살았다.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48년 3월, 마을 누군가의 모함으로 좌익 혐의를 받아 영주경찰서 소속 경찰 3명에게 끌려갔다. 수일간 구금된 그는 3월 21일쯤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구수골 저수지로 끌려가 총살됐다. 유족에 따르면 당시 저수지에는 6~7구의 시신이 함께 있었고, 박씨는 현장 인근 언덕에 매장됐다가 후에 선산으로 이장됐다.

또 다른 희생자인 정모씨(1922년생)는 영주시 상줄동의 부농으로, 토지를 팔아 좌익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1946~1947년 사이 군경에 의해 연행돼 영주 안정역 근처 야산에서 총살당했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정씨는 경찰의 감시대상이었고, 연행 직후 마을 어귀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임시 매장됐다가 후에 선산으로 이장됐다.

김모씨(1913년생) 역시 영주시 이산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장으로 활동하던 중 빨치산과의 연루 의혹을 받아 1949년 2월 경찰에 끌려가 내성천 지류 솔밭에서 총살됐다. 유족은 “아버지 시신은 피범벅이었고, 주머니 속 돈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마을 면장이 그를 견제해 좌익으로 모함했다는 증언도 있다.

희생자 유족들은 수십 년간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차별과 낙인을 견디며 살아왔다. 박모씨의 아들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아버지를 잃은 이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아버지 이름을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자랐다”며 눈물을 흘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은 국가기관인 군과 경찰이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법적 근거 없이 민간인을 살해한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밝히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와 유족에게 공식 사과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번 진실규명 결정은 2020년부터 시작된 유족들의 진실규명 신청에 따라 이뤄졌으며, 영주뿐 아니라 봉화, 청송, 칠곡, 의성, 군위, 구미 등지에서 총 21건, 21명의 희생 사실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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