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마주한 삶, 붓 끝으로 피어나다”

붓 잡은지 35년 화업의 여정…“그림과의 만남은 행운”
정원 딸린 작업실 ‘란아뜰리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작업
17일부터 22일까지 문화예술회관 철쭉갤러리서 개인전

교회가 보이는 풍경 116.7×80.3㎝ Oil on Canvas
교회가 보이는 풍경 116.7×80.3㎝ Oil on Canvas

“날씨가 좋네요. 젖은 마음도 걸어 놓으면 잘 마를 것 같은 좋은 날, 제 그림도 누군가에게 그런 날씨였으면 좋겠어요”

유순란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그림을 말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풍경화가’라 부르지만, 그녀는 단지 풍경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꽃을 그리기보다 꽃이 있는 자리를 느끼려 한다. 같은 자연도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면 전혀 다른 정서를 품기 때문이다.

자연을 마주한다는 건 어쩌면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다.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치는 들풀 한 포기, 겨울 해의 그림자, 조용히 흘러가는 강의 물결. 유 작가는 그 미세한 아름다움과 감정을 35년째 화폭에 담고 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게,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처음부터 유화를 한 것이 아니고 기초가 없어 학원에서 기초 도형부터 시작해서 드로잉, 수채화 등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다만, 자연을 바라보는 제 시선이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그림은 감상 이전에 ‘공감’이다. 그 공감은 기술보다 정서에서 온다. 유 작가의 그림엔 그 ‘정서’가 짙다. 사계절을 통과한 인간의 눈빛처럼, 담담하고 묵직하다.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유작가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유작가

▲ 붓을 잡은 건 우연이었지만, 멈추지 않은 건 선택이었다

그녀의 그림 인생은 이른 나이에 시작되지 않았다. 30대 중후반, 한 리조트에서 우연히 접한 전시회가 시작이었다.

“바람이 느껴지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림인데, 바람이 그림 속에서 불고 있었어요. 아, 나도 이런 걸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그때부터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오로지 붓 하나에 의지해 그림을 시작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은 작가에게 늘 따라다니는 콤플렉스였다. 그러나 그 콤플렉스는 결국 작가의 원동력이 됐다.

“그림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해요. 새소리, 혹은 맑은 숲속 공기를 접할 때처럼요”

공모전에 도전했다. 입선, 낙선, 다시 도전. 그렇게 하나씩 경력을 쌓아갔다. 마침내 20년 만인 2009년 추천작가로 등단했고 3년 뒤엔 초대작가가 됐다.

“누군가에게 작품을 보인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해내는 거죠. 제가 그림을 잘 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건 분명해요. 뒤늦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미술 비전공자’라는 약점이 오히려 스스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 뒤에도 꾸준히 단체전에 참여했고, 경북미술대전 심사위원과 영주미협 부지부장, 여성분과위원장, 감사 등의 임원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다. 인사동 서울미술관을 포함해 영주, 강릉, 서울, 컬쳐라인 갤러리 등지에서 여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미협, 경북미술대전 초대작가, 안동카톨릭미술가회 회원으로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화우회 그룹전, 누드모임전, 영은회원전, 아트 울산전, 한국미협 여류작가전, 동서미술 소통전, 카톡릭미술가전, 목포교류전, 영호남교류전, 한·중 교류전 등 지금까지 300여 회에 이르는 단체전 이력은 ‘참여’가 아닌 ‘성장’을 위한 시간이었다.

띠띠미의 봄 145.5×112.0㎝ Oil on Canvas
띠띠미의 봄 145.5×112.0㎝ Oil on Canvas

▲ “완벽한 그림은 없다. 늘 부족하고, 그래서 계속 그린다”

유 작가는 그림을 ‘끝나지 않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녀가 한 작품을 구상하고 그리는 시간은 평균 한두 달이다. 이유는 하나다.

“좋은 노래는 보여야 하고, 좋은 그림은 들려야 한다고들 해요. 제 그림이 다른 분들에게도 들릴까요? 그건 늘 고민이 됩니다”

그림은 시간이 있다고 해서 바로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평온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창작이다. 동적인 행위를 한 뒤이거나 조그마한 걱정이라도 있어서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다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마음이 평온해질 때 까지 몇일이고 작업실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걸 ‘그림의 무게’라고 말한다.

“어떤 선생님께서 얘기하셨어요. 자기 그림에 만족하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저도 그 말씀에 공감합니다.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 작품이 나와요. 잘 그린 그림이기 보다 좋은 그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온기로 데우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림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기록이다

유 작가는 회화의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다. 풍경이든 인물이든 정물이든 ‘마음이 가는 것’을 그린다. 다만 보는 것을 그대로 옮기는 사실주의 기법을 고집한다. 그것은 기술이라기보다, 태도다. 대상 앞에서 겸손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보이는 것을 그리지만, 그 안에 내 감정을 담아요. 같은 나무를 그려도, 내 마음이 밝으면 밝게 그려지고, 무거우면 그림도 무거워져요”

이번 전시에서도 그녀는 인물, 풍경, 정물을 넘나든다.

“이번엔 가족 그림과 자화상을 처음으로 공개할까 해요. 좀 부끄럽고 어떤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요”

김종한 작가(영주미협 초대 지부장)는 “2009년 첫 개인전 이후 일관된 기조로 지금까지 풍경, 인물 등 자연에서 체득한 직관과 감성을 바탕으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라며 “그의 작품은 자연을 관조하면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감흥을 솔직하게 맑고 투명한 색조로 보는 이로 하여금 평온하며 청아한 미적 쾌감을 준다”고 평가했다.

▲ 정원과 함께 자란 그림들…작업실은 또 하나의 자연

작가의 작업실 이름은 ‘란아뜰리에’다. 하루 중 절반 이상을 이곳에서 보낸다. 작업실 창을 일부러 크게 낸 이유도 자연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은 공간은 창이 크고 빛이 많다. 바로 앞엔 정원이 있다. 누가 꾸며준 게 아닌, 그녀가 손수 가꾼 정원이다.

“우리 집에 오시는 분들이 정원을 가꾸는데 힘들겠다고 해요. 저는 그게 즐거움인데 풀을 뽑거나 전지를 하거나 할 때는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 일에 완전히 몰입돼서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정원은 또 하나의 작업실이에요”

창 밖엔 철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나무가 있고, 창 안엔 계절 따라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 그녀는 이 공간을 “그림의 뿌리”라고 불렀다. 그녀의 삶은 이 공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때론 혼잣말로, 때론 붓끝의 떨림으로 자연과 이야기하는 시간. 말보다 붓이 많았고, 질문보다 관찰이 깊었던 하루하루다. 바깥 풍경이 바뀌면 그림도 바뀐다.

“같은 자연도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면 느낌이 전혀 달라져요. 그래서 늘 같은 장소라도 새롭게 마주합니다. 캔버스가 다시 열립니다”

▲ 전시회, 그 하나의 긴 호흡

“그림 그릴 때만큼은 아무 생각이 안 나요. 오롯이 나만 존재해요. 그림은 제게 쉼이며, 일이자, 곧 생활입니다. 붓을 들고 있을 때, 저는 가장 저답고 평온해져요”

전시를 앞두고 유 작가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뜰리에에서 보낸다. 기획부터 홍보까지 직접 도맡아 준비하고 있다. 전시장 구상도 직접 한다. 이번 전시는 액자를 생략하고 원화만 전시한다. “작품 본연의 색감과 질감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130여 점이면 액자값만 해도 상당해요. 팔린 작품만 액자에 넣어 드리려고요”

그녀는 전시회에서 누군가가 어떤 느낌을 받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떨린다고 했다. 특히 모르는 분이 그림을 구입해 주면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인정받는 것이어서 공모전에서 상을 타는 것 이상으로 기쁘다고 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리고, 그러다 하나를 골라 전시장에 거는 그 기분. 마치 마음 한 조각을 사람들 앞에 꺼내놓는 느낌이에요”

이번 전시회는 작품 가격도 공개한다. “보시는 분들도 궁금해하시니까요.” 유 작가는 그림이 판매되면 무엇보다 “누군가의 공간에 내 그림이 함께 간다”는 사실이 벅차다고 했다.

전시는 그녀에게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이번엔 어떤 작품을 봐주시려나, 내 그림이 누군가의 하루를 머물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가송에서 162.0×130.3㎝ Oil on Canvas
가송에서 162.0×130.3㎝ Oil on Canvas

▲ 그리고, 일곱 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속살을 볼 수 있는 눈은 드물다. 봄이 무르익는 5월, 유 작가의 제7회 개인전이 오는 5월 17일부터 22일까지, 영주문화예술회관 철쭉갤러리에서 열린다. 개막식은 5월 17일 오후 4시다.

이번 전시는 지난 수년간 전국을 돌며 자연과 마주한 순간들을 화폭에 담은 풍경화, 가족의 모습을 담은 인물화, 일상 속 정물을 그린 그림 등 130여 점으로 구성된다. 철쭉 갤러리 1~3관 전체를 임대해 놨다. 30~40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일반적인 전시회와는 달리 무려 13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기 때문에 3~4회의 개인전을 한번에 하는 격이다

“그림 덕분에 제 삶이 더 풍요롭고 행복했습니다. 오늘 하루, 제가 느끼는 모든 것과 마주한 모든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명이 없어도, 그림 속에 그 마음이 담겼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번 전시는 제목이 없다. 그냥 자신의 이름을 딴 ‘劉順蘭’ 전이다. 대신 그림마다 그녀의 시선이 녹아 있다. 한 점 한 점의 그림이 모여, 그녀가 살아온 35년이 된다. 자연을 사랑한 화가의 손끝에서, 또 하나의 계절이 피어난다.

“그림이 내 삶에 들어온 건 행운이었습니다. 이번 전시가 관람객 각자에게 그림과의 마주침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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