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속에서도 지킨 선친의 유산 ‘선비정신’을 품고 살아가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맨몸으로 세상에 나와 이룬 자립과 청와대 공직 생활

정보통신 경호관으로 다섯 대통령을 지킨 자부심

이명박대통령과 직원들
이명박대통령과 직원들
노무현대통령 내외분과 직원들
노무현대통령 내외분과 직원들

영주 태생으로 60대 이상의 사람 중 가난 속에서 선비정신을 강조하는 집안에서 자라고 일찍 홀로 세상에 나가 독립한 사람이 많다. 그들 중 상당수는 지금도 젊은이처럼 뛰며 현역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없었어도 부모 봉양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녀에겐 강요보다는 스스로 세계를 개척하도록 지원한다. ㈜토펙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정보통신감리 상무 황재특씨가 바로 그런 애향인이다.

황재특 상무(이하 황상무로 칭함)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바쁜 와중에도 초.중.고 모교의 재경 모임과 재경영주시향우회 모임에 가면 늘 실무를 자임하며 바쁘게 움직인다. 인터뷰할 깜냥이 아니라고 사양하던 황상무에게 애향인 코너는 고향 사랑하는 분을 모시는 코너임을 말하며 2025년 재경영주시향우회 정기총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상무는 자식을 키우기 위한 생업에 더해 선조들부터 내려온 한학에 매진한 선친(유당 황세섭)의 이야기를 먼저 했다.

선친을 많이 존경하시나 봅니다.

아버지는 선비정신을 중시하는 분이셨습니다. 정신만 강조하지 않고 선비처럼 행동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식구는 많고 가난한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 한약업을 비롯해 여러 일을 하시면서도 늘 한학을 손에 놓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 자주 돌아보곤 합니다. 8남매를 낳으시고 키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옛 전통을 이으려 하셨고 딸 둘을 어린 나이에 떠나보내시고 가슴 아프셨을 부모님을 요즘 들어 더욱 생각하게 됩니다.

선친이 구체적으로 어떤 걸 강조하셨나요?

아버지가 계신 사랑방에는 글을 지어 달라고 오는 사람이 늘 많았습니다. 덕분에 어른들과 손님을 대하는 품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습니다. 아버지는 생활이 어려워도 늘 공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손이 크고 음식을 잘하셨습니다.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대접이 소홀할까를 걱정하셨습니다. 두 분의 평소 모습이 제가 맨몸으로 사회에 나와 생활하는 데 지침처럼 작용했습니다. 지금의 제 존재가 부모님의 은덕임을 새삼 느낍니다.

선친의 문집 유당문고 출판기념회
선친의 문집 유당문고 출판기념회

선친은 여러 번 뵈온 적이 있습니다. 한학에 밝으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 쓰신 글들을 모아 2003년 『유당문고』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쓰신 글들은 제문, 비문, 상량문, 축문, 한시 등 다양했습니다. 당시 지인들을 초청해 출판 기념회를 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영주시는 선비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시며 ‘고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셨습니다. 김영하 교장 등 여러 어른이 함께 활동하셨습니다. 아버지 연세 70에 컴퓨터를 배우려 하셔서 당시로선 최신인 도스컴퓨터를 사드렸고 과외도 받으셨는데... 결국 실패하셨습니다만 그 열정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말년에는 삼판서고택 복원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선친께서 삼판서고택 복원을 원하셨군요?

저의 청와대 시절,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경북도청 신년업무보고에 참가했는데 행사 시작 10분 전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막무가내로 대통령 동선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3층에서 확인하니 눈에 익은 가방이 눈에 클로즈업 되었습니다. 아버지셨습니다(함께 웃음). 뛰어 내려가니 아버지는 5층 문화진흥과에 삼판서고택 복원 예산 배정 민원을 위해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경북도 문화진흥과에 가니 그다음 해 반영 검토를 하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 후 김주영 시장 재임 시 삼판서고택이 복원되었는데 아버지께선 그렇게 원하시던 걸 보시지는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삼판서고택의 두 번째 주인인 황유정 판서의 추원재 중건과 묘역 단장, 유홍준 교수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목민관이라 칭송한 금계 황준량 선생의 선양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대통령 동선에서도 고집을 피우셨던 분이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공감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선친 이야기는 그만 하시고(함께 웃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8남매의 7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는 집에서 약 3 Km 거리의 이산동부초였습니다. 한글도 모르고 입학했지만 나름 똑똑했나 봅니다. 5학년 때 반장도 했거든요(함께 웃음). 4학년 때 집안이 더욱 기울어 반장 부모님이 관례로 준비하던 담임 선생님 도시락도 준비 못해 무척 실망했습니다. 청와대 근무 시 그 담임 선생님이 장씨 종친회장으로 80여 분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하셨을 때 춘추관 앞에서 영접하고 안내하고 작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선생님이 자신의 교직 생활 중 수제자라 저를 소개도 하시고.. 사실은 수제자가 아니었습니다(함께 웃음). 중학교 입학하면서 영주 시내 작은아버지 댁에서 생활했습니다. 너무나 작은 집이었는데 숙모님이 차별없이 대해주셨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며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의 고생 때문인지 해병대 생활도 잘하고 사회생활의 어려운 상황도 넘기는 근성을 길렀던 것 같습니다.

영주중학교 27회 친구들과
영주중학교 27회 친구들과

서울은 언제 가셨나요?

20살 때 편도 차비만으로 친구를 찾아가 안산 반월공단 대일전선에 그날 취업했습니다. 취업 후인 1981년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2014년 말까지 생활비를 집에 보내드린 게 나름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20세에 취업을 하셨군요. 대학원까지 나오셨던데 주경야독이었나 봅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대학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22살 때 해병대 부사관이 월급도 받는다 해서 바로 지원했습니다. 해병대 부사관으로 있으면서 방송통신대에 입학했습니다만 졸업은 못하고 한참 후에 서울과학기술대 매체공학과 야간을 졸업하고 쉰 살이 넘어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대학원 방송통신정책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만학이셨군요. 그동안 직장을 옮기시기도 했고요?

해병 부사관 전역 무렵 해군본부 군무원 공채에 46대 1의 경쟁 속에 합격했습니다. 엄청 짜릿했습니다(함께 웃음). 당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영주의 부모님을 찾아뵙곤 했는데 아내를 기차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돈도 없는 제 청혼을 받아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저는 경우 없는 짓을 보면 지금도 욱하는데 국방대학교 근무 중 당시 6급 승진을 앞둔 7급 고참이었지만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 뒤 여의도 소재 광고대행사에 입사했는데 불규칙적 생활에 아내의 요청으로 다시 공직에 응시했는데 9급직이었습니다. 최종면접 면접관인 해병대 대령이 청와대 파견 보직을 이야기하며 근무가 힘들다 하길래 그 자리에서 도전하겠다 했습니다. 7급 고참 경력자가 9급 신참이 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 파견 근무를 하며 김영삼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총 다섯 분의 대통령을 모시는 정보통신경호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국방부 퇴직 기념
국방부 퇴직 기념
아내와 함께 백두산 천지에서(2024년)
아내와 함께 백두산 천지에서(2024년)
가족 방문 시 노무현대통령과
가족 방문 시 노무현대통령과 함께

다섯 분의 대통령을 모신 정보통신경호관 재직 시의 에피소드 소개 가능할까요?

비사는 안 되고요(함께 웃음). 대통령의 절대 안전 경호업무를 약 600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했다고 자부합니다. 2000년 서울 ASEM회의, 2005년 11월 부산 APEC, 2010년 G20,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등에서 경호통신지원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로로 수회에 걸쳐 대통령경호실장 표창과 문화관광부장관상장 등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늘 같이 근무하는 분들을 예로 대하고 예를 기준으로 일에 임했습니다. 청와대 파견 근무를 마치고 국방부로 돌아와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며 대학원 논문도 마칠 수 있어 후배들의 역량 강화에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조상의 은덕이라 생각합니다.

공직 재직 중 고향 관련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김대중 대통령이 영주의 한국담배인삼공사 기공식에 참석하셨습니다. 동서화합 일환의 행사였습니다. 저는 제 출장 스케줄을 바꾸어 대통령의 영주 방문에 함께 했습니다. 아버지가 행사 초대를 받지 못하셨다길래 내빈석에 자리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아버지께 효도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버지 옆 좌석의 교장선생님이 저의 영주중학교 시절 국어를 가르쳤던 유영찬 선생님이셔서 인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영주에 오셨을 때는 영주시청 대회의실의 대통령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 작은아버지 자리를 마련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향우회 등 고향 관련 행사에 적극 활동하시더군요?

분초를 다투는 청와대 청와대 파견을 마치고 국방부 복귀 후 주변과 고향을 챙길 여유가 생겼습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초.중.고 동문회, 재경 영주시향우회, 그리고 해병대 동기회 등에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라는 곳과 봉사할 곳이 너무 많습니다.

고향 행사에 가면 인생을 열심히 살아오고 고향을 사랑하고 지원하는 분들을 뵐 수 있어 기쁩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저의 고향 사랑이 많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2023년 고향 영주에 호우 피해가 났을 때 재경영주중동문회 사무국장으로서 수해의연금 모금 운동을 출향인으로서 제일 먼저 했는데 일주일 만에 500만 원이 모여 다른 동문회에 자극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현재 정보통신특급감리원으로 공직 퇴직 후 중견 엔지니어링회사인 (주)토펙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에서 상무로 재직하며 제2의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통신으로 이루어지는 초연결사회의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에 일조하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현역의 삶을 영위하려고 합니다. 고향 영주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으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습니다. 우선은 참여가 먼저인 것 같습니다. 

<황재특 상무 프로필>

- 이산면 지동1리(질골) 출생

- 이산동부초 10회, 영주중 27회,

   영주제일고(전기과) 33회

- 서울과학기술대 매체공학과 학사,

-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대학원

   방송신정책 석사

 

- (현) ㈜토펙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에서 정보통신감리 상무

- (현) 재경영주중총동문회 사무국장

- (현) 재경영주시향우회 이사

- (역임) 해병대 부사관 163기(1983~1987)

           / 해군본부, 국방대학교 군무원(1987~1994)

          / 대통령 경호실 파견(1996~2015) / 합동참모본부 전산실장(2015~2021)

- 수상 : 보국훈장 광복장(국가유공자 등재), 대통령경호실장 표창, 문화관광부장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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