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늘 그곳에…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참 따뜻한 일이죠”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은퇴 후엔 고향으로”…수구초심이 당연하다는 애향인
킥복싱 챔피언에서 도예가, 그리고 부동산 대표까지
도자기에 담은 인생 철학…환상과 번뇌를 굽다
“열정으로 파고들어야 길이 보입니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각인되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가 있는 고향은 결국 돌아올 곳이라고 말하는 애향인이 있다. 지금은 부동산업으로 바쁜 시티(창영) 최병선 대표이다. 그는 수구초심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금년 4월 4일에도 고향에 들러 모교인 풍기북부초등학교 동창들에게 저녁을 산 그는 고향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 어려운 가정형편을 딛고 킥복싱 특기생으로 대학을 진학했다. 한때 킥복싱 한국 밴텀급 챔피온을 하기도 한 그는 좋아하는 복싱은 취미로 돌리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여러 일을 했으며 봉사활동 또한 빠지지 않으면서 바쁜 와중에도 고향 친구 모임에는 빠지기 않고 잠시라도 얼굴을 비추었다. 매년 고향에 여러 번 들르는 그를 만났다. 그의 말 중 은퇴 후 귀향이 있어 더욱 반가웠다.
고향에 오실 계획이라고요?
은퇴 후 고향으로 올 계획입니다. 부모님이 짓고 제가 중간에 보수한 집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곳으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부모님 세대와 달리 지금 제 나이는 일해야 합니다. 자녀 세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제가 체력적으로 건강한 면도 있고요. 고마운 건 아내가 귀향에 찬성한다는 점입니다. 귀향할 때 귀향을 둘러싼 부부싸움은 없을 겁니다(함께 웃음).
70세인데 건강하시다니 대단합니다. 어떻게 귀향 생각을 하셨는지요?
사실 허리 수술을 해서 젊은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고등학생이랑 같이 어울릴 수 있었는데... 고향 생각을 다들 하지 않나요? 수구초심이란 말도 있잖아요. 저는 늘 은퇴하면 귀향하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운동을 하며 고등학생과도 어울린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20대 중후반까지 킥복싱 선수였습니다. 생활 때문에 킥복싱 선수 생활을 그만두었지만, 취미와 운동으로 계속 킥복싱을 했습니다. 60대 중반까지도 운동으로 킥복싱을 했는데, 고등학생이랑 같이 운동하고 스파링도 하곤 했습니다. 별로 밀리지 않았습니다.
대단합니다. 어디에서 태어나 자라셨나요?
저는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그 뒤 부모님을 따라 풍기로 이사했습니다. 풍기북부초등학교를 4학년부터 다녔습니다. 그 뒤 금계리의 금계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부산으로 가서 그곳에서 대학까지 다녔습니다.
부모님이 풍기로 이사하셨군요.
부모님이 정감록을 신봉하셨나 봅니다. 어릴 때 정감록을 이야기하시는 걸 듣기도 했습니다. 달밭골로 이사하시려고 했으나 정착할 공간이 없었나 봅니다. 그래도 소백산 깊은 곳에 토굴을 파고 난리를 대비해서 식량을 보관하기도 하셨습니다. 보관한 곡식에 곰팡이가 생겨 안타까워 하시며 버리곤 하셨단 것도 압니다. 언제까지 그러셨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풍기 정감록 역사의 한 부분이군요. 복싱은 언제부터 배우셨나요?
당시에도 학교폭력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맞지 않기 위해 복싱을 시작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복수심도 있었지만요(함께 웃음). 덕분에 제가 복싱 특기생으로 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하.
학교폭력은 문제입니다. 트라우마에 걸리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동감입니다. 학교폭력 문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부산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후배가 선배를 경기에서 이기면 비상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어른들도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후에 로타리클럽 등 사회 활동을 하면서도 늘 신경을 쓰는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성년이 되어서 힘없는 학생이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걸 보면 뛰어들어 말리고... 그러다 제가 집단 린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하는 길이 있으면 참여했습니다. 소년원 감사장 등 여러 감사장도 받았습니다.
괴롭힘 현장을 못 본 척 지나가는 어른이 많은데 대단하십니다. 킥복싱 선수 생활은 언제까지 하셨나요?
20대 중반까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때 한국 킥복싱 밴텀급 챔피온도 했습니다. 당시 에피소드도 있는데 상대 선수 팬츠가 내려가 있어 그쪽을 보는데 상대도 그걸 느꼈는지 팔을 내리고 저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비어있는 상대의 턱에 강타를... 미안했습니다. 한동안 그 선수가 다니던 도장을 피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킥복싱 선수를 그만둔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여주에 사시던 고모의 권유로 여주에 가서 도자기를 배웠습니다. 제가 직접 굽고 나중엔 큰 전시장도 만들었습니다. 그때가 20대 후반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도자기가 비싼 값에 일본으로 팔려나가던 때입니다. 80년대 중반 우리나라도 3저 호황으로 선물에 도자기가 주류를 이루던 때입니다. 그때 고향 친구들이 버스로 제 도자기 전시장에 견학을 와서 고향 친구들과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어떤 도자기였는지요?
제가 몰입한 도자기는 고대 낙랑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도자기 ‘와태(瓦胎)’입니다. ‘와태’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도자기였습니다. 와태칠기는 도기류를 태로 제작하여 내외부에 옻칠을 하고 그 위에 문양을 그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와태는 아름답고 화려함에서 기존 도자기의 사실적인 표현 방법을 탈피합니다. 추상적이고 상상적 차원에서 인간의 고뇌, 승천, 용트림, 낙원, 극락도, 석양, 일출, 삶, 번뇌, 환상의 세계, 천지창조, 부활 등을 표현합니다. 그런 표현 기법으로 가슴에 강하게 와닿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문외한이라 어렵게 느껴집니다(함께 웃음). 활약을 많이 하셨다 들었습니다.
활약은 옛 이야기입니다. 현대 미술대전 입선, 한국미술공모대상전 특선, 국제문화예술대전 특선, ‘88민예품공모전 입선, 한국공예품경진대회 도예부문 대상, 한국문화예술제 대상 등 많은 상을 받긴 했군요(함께 웃음).
한국민속예술 공예 위원, 87년도 한중일 신춘초대전 초대작가, 한국예술대전 초대 작가도 했습니다.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은퇴 후엔 도자기를 또 굽지 않을까란 생각도 듭니다.
로타리 클럽 회장도 하셨지요?
로타리 활동은 여주에 있을 때부터 했습니다. 국제적 활동도 하는 로타리입니다. 국제로타리클럽 3600지구 여강로타리클럽 5대 회장을 했습니다.
회장으로 선임되기 전에는 오랫동안 총무로 봉직했습니다. 봉사활동과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커서 사회 구성원으로 잘 성장하는 걸 보는 보람도 큽니다. 국제로타리클럽은 매주 1회 모임을 원칙으로 하는지라 시간을 내기 힘든 지금은 휴면회원입니다.
현재 하시는 일은 부동산업이고 부천에 사시지요?
아들이 어릴 때 똑똑한 걸 본 선배가 권유해 부천으로 단독 전학시켰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걸 힘들어하길래 우리 부부도 부천으로 이사했습니다. 여주에 있을 때부터 선배의 권유도 있고 해서 생업으로 부동산업을 공부했는데 학원을 반은 결석하곤 했으나 공인중개사에 덜컥 합격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의 시작이었지요. 부천으로 이사하며 건물을 사 1층은 매장으로 임대하고 2층을 집으로 삼았습니다. 1층 매장 임대인이 이전을 하겠다고 해서 하게 된 일이 마트였습니다. 고향 후배의 강권이 있었습니다. 교사이던 아내가 마트 경영을 책임졌습니다. 아내의 경영능력이 좋았는지 마트가 잘 되었습니다.
직업을 바꾸면서도 성과를 내셨군요. 마지막으로 고향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기가 하겠다고 결정했으면 열정적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이 열린다고 봅니다. 긴가민가 생각만 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봅니다. 아무리 전망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몰입하지 않으면 그 일에서 성과가 나지 않는 것 같아요. 열정적으로 몰입하면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 전에 했던 일에서 터득한 지식과 지혜를 쓸 수 있습니다.
제 경우를 보면, 여주시 전시장 운영 경험으로 어떤 위치가 좋을지, 그 위치에 따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아니면 사람들이 오게끔 하는 방법을 생각한다든지... 그런 것들은 부동산업을 하는데도 참고가 되거든요. 마트 경영도 마찬가지였고요. 물론 시대 변화에 따라 달리 판단도 해야 하고요. 어떤 일을 하든 말입니다.
<최병선 대표 프로필>
- 강원도 인제 태생
- 영주시 풍기북부초등학교 졸업
- 금계중학교 졸업
- 부산 동의고등학교 졸업
- 부산 동아대 졸업
- 한양대 대학원(경영학 석사)
- (현) 시티(창영) 대표
- (현) 한양미술협회 회원
- (전) 한국 킥복싱 밴텀급 챔피온
- (전) 한국 고유의 도자기 瓦胎 장인
- (역임) 국제로타리 3600지구 여강로타리클럽 5대 회장
- 부천시 공인중개사회 회장
- (사) 한국민속예술연구원 연구위원
- ㈜ 종합청소년신문 홍보위원
- (수상) 킥복싱 우승 다수
- 도예 부문 입선 및 대산 다수
- 법무부 대구소년원 감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