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복 (소백산백년숲 사회적협동조합 이사)

햇살이 따사롭다. 멀리 강 얼음 위에 눈이 하얗게 빛나고 얼음 가장자리로 오리들이 자고 있다. 소나무 둘레 안쪽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아래는 큰형이 잠들어 있다. 눈이 내려 포근하게 쌓였다. 향나무 냄새를 맡으며 걷는다. 아늑하다. 따뜻하고 상쾌하다.

40년 전, 입대하고 일 년쯤 되었을 무렵 한겨울이었다. 대대전술훈련에 나섰다. 상대는 26여단 기보대대. 포천 이동면과 일동면 일대에서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하는 것이었다. 대대는 트럭을 타고 이동해 포천 이동면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월 중순이었고 눈이 많이 내렸었다. 비포장도로는 눈이 다져져 빙판이 되어 있었다. 대대는 적의 공격을 지연하며 후퇴했다.

후퇴할 때마다 언 땅을 깊이 파고 방어진지를 겸해 추위를 막을 거처를 마련했다. 3일간 방어하고 하루 휴식한 후 3일간 공격하는 일정이었다.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정찰 활동을 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퇴각할 때도 피해가 없도록 질서 있게 기동해야 하는 훈련이었다. 눈 쌓인 들과 산을 뛰어다니다 보면 군화가 흥건히 젖어 양말을 벗어 짜야 할 정도였다.

훈련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훈련한 기량을 발휘했고 다친 병사 하나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격하는 우리 대대는 야산을 통해 적의 측면을 공격하면서 중대 하나를 대기시켜 전열이 무너진 적의 퇴로를 막도록 했다. 마침내 산을 넘어 은밀하게 접근해 갈 때 아군 곡사포 사격에 적의 화력은 무력화되었고 패주하는 적들을 향해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적은 대오도 없이 흩어져 달아났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훈련의 끝이었다. 그러나 대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3중대는 측면으로 기동해 적의 퇴로를 막아라!” “남김없이 섬멸하라!” 추위 속에서 전투식량을 먹으며 일주일째 버틴 병사들을 향해 눈 쌓인 산을 넘어 뛰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중대장이 대원들을 독려해 야산 너머 숲속에 다다라서 함성을 지르고 군가를 목청껏 부르고 나서야 대대장은 복귀 명령을 내렸다. 이제 끝이다. 트럭을 타고 두 시간만 가면 따뜻한 막사에서 군화를 벗고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집결지로 돌아갈 때는 훈련 첫날 트럭에서 내렸을 때만큼 생기가 돋았다.

대대가 집결하자 대대장이 한껏 멋을 부리며 훈시했다. “제구 용사들이여! 우리는 눈보라 속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적을 섬멸하고 승리했다. 재구대대 만세!” 우리들은 대대장의 선창에 맞춰 만세를 불렀다. 군장이며 짐은 오전에 트럭에 싣고 매 놓은 상태다. 아무리 빙판길이지만 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모두 긴장이 풀리며 탑승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 위에 있던 대대장이 운전병을 불렀다. “귀관은 지금 즉시 부대 장비를 인솔해 복귀하라!” 하고 명령했다.

대대장 차 운전병은 상병이었는데 ‘귀관’이라고 하며 멋을 부렸다. 운전병이 지프를 몰고 가면서 대기하던 트럭을 향해 손을 휘젓고 도로로 나가자 트럭들이 줄지어 따라갔다. 보아하니 계획된 것이었다. 마지막 트럭이 도로에 올라서고 줄지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대대장의 계획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대대장이 지휘봉을 쳐들며 외쳤다. “제군들, 나를 따르라!” 그는 큰 키에 팔을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병사들이 멀어지는 대대장을 보고만 있을 때, 중대장이 외쳤다. “1중대 앞으로! 행군대형으로 벌려! 1소대는 첨병 위치로!” 그렇게 우리는 밤새 걸었다. 비탈진 빙판길을 걸으려면 허벅지를 안쪽으로 조여야 한다. 기온이 떨어쳐 동상이 염려되어 쉬는 것도 멈추지 않고 속도를 늦추었다 올렸다 하며 행군했다. 넘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뒤에서 개머리판으로 철모를 때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배고프고 피곤한 병사들이 걸으면서 잠든다. 나는 자면서 꿈도 꾸었다.

앞선 병사가 열을 벗어나면 뒤에 선 병사가 개머리판으로 철모를 때려 잠을 깨워야 한다. 포천 이동면에서 가평 현리까지 오는 내내 넘어지는 소리, 철모 때리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대대장은 행군 내내 대원들을 독려하며 휘적휘적 걸었다. 아침 아홉 시 즈음에 멀리서 군악대 소리가 들렸다. 맹호는 간다, 행군의 아침 등 익숙한 군악대 연주 속에 일요일이라 면회 온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복귀했다.

몇 달 후, 대대장은 육사 관리부장으로 전출되었는데 진급하지 못하고 중령으로 예편했다. 그때 병사들은 대대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요즘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분이 얼마나 세심하게 부하들을 챙겼는지 알게 되었다.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일만 남았는데 빙판길이니 트럭이 위태롭게 운행해야 했고, 눈밭을 뛰어 군화마저 젖어버린 상태로 트럭을 타고 복귀했다면 모두 동상에 걸렸을 것이다. 고민 끝에 앞서 걸으며 행군을 이끌었을 것이다.

덕분에 혹한기 일주일 훈련에서 모두 털끝 하나 다친 데 없이 복귀할 수 있었다. 그때 대대장에 비하면 요즘 매일 뉴스를 덮는 비열한 거짓말쟁이 군인들은 발톱에 때다. 새삼 대대장님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나는 살면서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이 있을 때면 그날 밤 꾸었던 꿈을 떠올린다. 눈에 덮인 아늑하고 따뜻한 강언덕, 할머니 무덤가를 걷던 꿈을 떠올리면 모든 괴로움이 눈처럼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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