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시인)
쓸쓸함의 비결
-박형권
어제 잠깐 동네를 걷다가
쓸쓸한 노인이
아무 뜻 없이 봉창문을 여는 걸 보았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내 발자국 소리를 사그락 사그락
눈 내리는 소리로 들은 것 같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문 밖과 문 안의 적요寂寥가 소문처럼 만났다
적요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탱탱하여서 느슨할 뿐
안과 밖의 소문은 노인과 내가 귀에 익어서 조금 알지만
그 사이에 놓인 경계는
너무나 광대하여
그저 문풍지 한 장의 두께라고 할 밖에
문고리에 잠깐 머물렀던 짧은 소란함으로
밤은 밤새 눈을 뿌렸다
어제오늘 끊임없이 뿌리는 눈에 관하여
나직나직하게 설명하는 저 마을 끝 첫 집의 지붕
나는 이제 기침소리조차 질서 있게 낼만큼
마을 풍경 속의 한 획이 되었다
나도 쓸쓸한 노인처럼 아무 뜻 없이 문 여는 비결을
터득할 때가 되었다
실은 어제 밤새워 문고리가 달그락거렸다
문고리에 손 올리고 싶어서
나는 문을 열었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설을 맞는 나이마다, 생활마다 섣달그믐의 표정이 다 다릅니다. 표정의 간격을 더 벌리는 것은 대중가요 노랫말인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때문 아닐까 싶어요.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요.
쓸쓸한 내가 “어제 잠깐 동네를 걷다가/ 쓸쓸한 노인이/ 아무 뜻 없이 봉창문을 여는 걸 보”는 순간, 문 안팎의 두 쓸쓸함이 겹쳐집니다. “그 사이에 놓인”, “적요寂寥”가 너무 넓어 겨우 “문풍지 한 장의 두께”라는 반어가 아찔합니다. 쓸쓸함에 무슨 비결이 있겠어요? 행복도 아니고… 그래도 이 시에서는 길 위의 시간을 함께 어루만지면서, 쓸쓸함을 넘어 선 너그러움을 나직하게 뿌려놓고 있어요. “눈 내리는 소리”조차 가다듬으면서요.
세밑입니다. 그도 아직 거기에 있고, 나도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문고리에 손 올리고 싶어서/ 나는 문을 열”어 봅니다. 따뜻한 떡국 한 그릇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