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경 (수필가)

대화가 중요한 시대다. 정확히 말해 안전한 대화가 필요한 시대다. 대화란 애초 의사전달이 목적이지만, 상대에게 정확하고도 안전하게 뜻이 전달되려면 선입견이 배제된, 객관성과 신뢰성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대화를 잘한다는 건 세련되거나 남을 조정하는 말이 아닌, 솔직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말의 오고 감을 뜻한다.

무엇보다 상대가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 들고 상대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끝까지 들어줘야 할 때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풀어놓는 이야기를 마냥 들어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건 진심이 담긴 이야기가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는 신뢰에서 비롯돼야 바른길을 갈 수 있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화 중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언제쯤 끼어들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할까를 생각한다면 안전한 대화법이 아니다. 상대가 전달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대화를 유도하며 경청해 줄 때 신뢰는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신뢰의 바탕 위에 안전한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대화를 할 때 무조건 말이 오가야 하는 건 아니다. 할 말이 있는 사람은 하고, 없으면 그냥 듣기만 하면 된다. 상대와 대화 중, 간혹 침묵이 흐를 때가 있는데 그때는 침묵을 즐기면 된다. 침묵이 어색해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말을 하다 되레 불편한 상황을 초래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 습관을 본인이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습관은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몸짓에서, 표정에서, 말투에서 지금껏 살아온 습관은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여러 습관 중에서도 말투야말로 인간관계를 결정짓는 열쇠라 할 수 있다. 배려 없이 던지는 말, 가시 돋친 말, 앞에서는 감언이설 뒤에선 담화, 결국 이런 불안한 말들이 인간관계를 해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말투를 원한다. 경솔하거나 무례한 말은 사양한다. 세련되고 입에 발린 말보다는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을 기대한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라고 하면서 은근히 무시가 곁들면 건강한 대화가 오갈 수 없다. 불안한 대화는 간혹 사람을 잃게도 한다. 우리가 대화를 안전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뿐 아니라 상대까지도 말속에서 체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은영 박사는 사람이 화가 나면 15초가 중요하다고 했다. 화가 막 솟구칠 때 대뇌는 도파민이 활성화되는데, 사람의 감정과 행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뇌에서 도파민 수치가 올라올 때 잠시 생각을 멈추면 분노가 사그라든다고 하는데, 끓어오르는 화 앞에 생각을 멈추고 화를 잠재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불안한 마음 상태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사회에서 찰나의 화를 참지 못해 불행을 자초한 일이 또 얼마나 많은가. 뒤늦은 후회로 발을 동동거려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이미 누군가는 감당조차 어려운 상처를 받았을 테고, 또 누군가는 그 아픔으로 삶의 근간이 흔들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났을 때 바로 반응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 이도 있다. 반응은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지만, 대응은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다. 반응 화법보다는 대응 화법이 인간관계를 손상하지 않는 안전한 대화법임에도 순간을 참지 못해 우리는 화를 자처하기도 한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듣기에 편안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상대를 인정해주는 말부터 시작한다. 상대는 나와 다르며 같은 상황에서도 해석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다. 공감은 인정에서부터 시작되며, 그로 인해 안전한 대화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짐을 이르는 말이다. 타인을 깎아내리든 치켜올리든 그 사람이 지닌 가치는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든 고귀한 존재이기에 인정받지 못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람을 인정한다는 건 안전한 대화로 가기 위한 바른 장치이기도 하다. 2024년 올 한 해, 수고한 자신에게 ‘수고했다, 고마웠다.’라고 토닥이며, 심신을 안전하게 정리해 나가는 연말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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