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동양에서는 가장 지향(志向)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군자를, 가장 지양(止揚)해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상으로 소인을 말한다. 군자와 소인에 대해서는 동양의 각종 유교 경전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 많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示唆點)을 주고 있는 글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서 올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와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와 횡거(橫渠) 장재(張載)와 안락와(安樂窩) 소옹(邵雍) 등 북송오자(北宋五子) 가운데 한 사람인 강절선생(康節先生) 소옹(邵雍: 1012-1077)이 지은 「군자음(君子吟)」이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군자여의(君子與義).소인여리(小人與利).여의일흥(與義日興).여리일폐(與利日廢): 군자는 의리(義理)와 더불어 하고 소인은 이익과 더불어 한다. 의리와 더불어 하면 날마다 흥성하고 이익과 더불어 하면 날마다 피폐(疲弊)해진다.

의리(義利)는 완전히 대립이 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의리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다. 욕심도 작은 욕심은 욕심이지만 대욕(大慾)은 이미 욕심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날마다 피폐하게 만드는 이익 추구보다 날마다 흥기(興起)시키는 의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군자일 것이다.

군자상덕(君子尙德).소인상력(小人尙力).상덕수은(尙德樹恩).상력수적(尙力樹敵): 군자는 덕을 숭상하고 소인은 힘을 숭상한다. 덕을 숭상하면 은혜를 심고 힘을 숭상하면 원수를 심는다.

덕과 힘은 상반되는 개념이다. 덕은 감화(感化)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열복(悅服)이나 심복(心服)이 가능하지만 힘은 완력(腕力)을 통해 행사되므로 가복(假服)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힘을 쓰는 자는 하수(下手)요 소인이며 덕을 베푸는 자는 고수(高手)요 군자이다.

군자작복(君子作福).소인작위(小人作威).작복복지(作福福至).작위화수(作威禍隨): 군자는 복을 짓고 소인은 위협을 짓는다. 복을 지으면 복이 이르고 위협을 지으면 재앙이 따른다.

복은 철저히 공짜 개념이 아니다. 복을 지은 자만이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복을 지어야 복이 오고 위협과 겁박(劫迫)을 지으면 재앙이 반드시 따르게 된다. 복도 짓지 않고 복 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삶은 밤에서 싹이 트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군자낙선(君子樂善).소인낙악(小人樂惡).낙악악지(樂惡惡至).낙선선귀(樂善善歸): 군자는 선을 즐거워하고 소인은 악을 즐거워한다. 악을 즐거워하면 악이 이르고 선을 즐거워하면 선으로 돌아간다.

선악(善惡)은 시비(是非)와 더불어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선악의 개념에 혼동을 일으키면 인류 공동체는 존립하기 어렵다. 모두가 선을 지향하고 악을 지양해야 공동체가 유지되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군자호예(君子好譽).소인호훼(小人好毁).호훼인노(好毁人怒).호예인희(好譽人喜): 군자는 칭찬을 좋아하고 소인은 헐뜯는 것을 좋아한다. 헐뜯는 것을 좋아하면 사람들이 화를 내고 칭찬을 좋아하면 사람들이 기뻐한다.

칭찬과 헐뜯음은 다른 사람의 존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다. 타인의 존재에 대한 긍정에서 칭찬이 나와 그를 격려(激勵)하고 권면(勸勉)하게 된다. 반대로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에서 헐뜯음이 나와 그를 위축(萎縮)되게 하고 모멸감(侮蔑感)을 느끼게 한다. 입에 담는 말이 칭찬이냐 헐뜯음이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은 판명(判明)된다.

군자사흥(君子思興).소인사괴(小人思壞).사흥소상(思興召祥).사괴소괴(思壞召怪): 군자는 일으켜 세우기를 생각하고 소인은 파괴하기를 생각한다. 일으켜 세우기를 생각하면 상서로움을 불러오고 파괴하기를 생각하면 괴변(怪變)을 불러온다.

무엇이든지 넘어진 것을 일으키려는 사람과 성한 것을 파괴하려는 사람이 있다. 넘어진 것을 짓밟아버리는 사람은 소인이고 성한 것을 파괴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려는 사람은 군자이다. 이처럼 군자와 소인은 극명(克明)하게 엇갈리는 양태(樣態)를 보여준다.

군자호여(君子好與).소인호구(小人好求).호여다희(好與多喜).호구다우(好求多憂): 군자는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하고 소인은 남에게 요구하기를 좋아한다.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면 기쁨이 많을 것이고 요구하기를 좋아하면 근심이 많을 것이다.

소인은 주는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남에게 요구하나 군자는 그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주기를 좋아한다. 주는 사람은 주어서 좋고 받은 사람도 좋게 주므로 역시 기쁜 것이다. 그러나 소인은 요구하기를 좋아하므로 남이 주지 않으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빼앗을까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지새니 기쁨이 있을 수 없다.

군자호생(君子好生).소인호살(小人好殺).호생도행(好生道行).호살도절(好殺道絶): 군자는 살리기를 좋아하고 소인은 죽이기를 좋아한다. 살리기를 좋아하면 도가 행해지고 죽이기를 좋아하면 도가 끊어진다.

모든 생명체는 호생오살(好生惡殺)이다. 즉, 살기를 좋아하고 죽는 것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나와서 그 어떤 것이 죽는 것을 좋아할 리는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소인은 죽이기를 좋아하니 자연의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질서에도 위배가 된다. 심지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방장불절(方長不折)’이라는 말이 있다. ‘바야흐로 성장하는 나무의 싹은 꺾지 말라.’라는 뜻이다.

하물며 자라는 싹도 꺾지 말라고 했는데 죽이는 짓은 차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소인은 죽이기를 좋아한다. 죽이기를 좋아하면 도는 더 이상 행해질 수가 없다. 도의 행해짐은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이로써 생명을 살리기 좋아하는 군자와 죽이기를 좋아하는 소인의 구분은 명확해진다.

강절선생 소옹의 「군자음」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군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군자는 진정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으나 소인은 자기 혼자만 살려고 남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인간군상(人間群像)이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든다. 소인을 지양하고 군자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공자(孔子)도 제자인 자하(子夏)에게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어야 하고 소인유(小人儒)는 되지 말라.[女爲君子儒.無爲小人儒]’라고 논어(論語)의 「옹야(雍也)」편에서 강조하고 있다. 군자유는 진정한 선비이고 소인유는 가유(假儒)요 부유(腐儒)이다. 올 한 해가 마무리되기 전에 우리는 모두 새해부터 ‘소인유’를 버리고 진정한 ‘군자유’가 되기를 각자가 스스로에게 다짐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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