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갑자기 내린 첫눈처럼 가을이 성급하게 겨울 문턱을 넘어섰다. 이제 우리에게는 2024년도의 달력이 달랑 한 장만 남아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기 마련이고,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또 다른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은 길을 걷는 것과 동일하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질문은 곧바로 어떤 길을 걸었느냐의 질문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해마다 이맘때면 사단법인 ‘문화랑’에서는 시민들의 풍요로운 문화적 삶을 위해서 ‘길을 묻는 그대에게’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공연한다. 이 공연을 시작한 지는 3년이 되었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빈약한 재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3년 연속 앙코르 공연을 한다. 지방 소도시에서 뮤지컬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일 수밖에 없다.
‘미스터(미스)트롯’ 열풍 이후로 지방에서도 대중 문화산업은 어느 정도 시장성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뮤지컬과 같은 공연예술 영역에서는 그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자들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또 수준 높은 작품을 공연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열악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나라’, ‘죽계별곡’, ‘의열’, ‘무섬연가’ ‘길을 묻는 그대에게’ 등 인상 깊은 뮤지컬을 공연한 (사)‘문화랑’의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지난 11월 26일에 공연한 ‘길을 묻는 그대에게’라는 작품은 정말 소박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출연자도 4명밖에 되지 않고, 주크박스 음악 담당도 가장 기본적인 그룹사운드이다. 무대 또한 단일 무대로 단순하기 짝이 없다. 주로 7080세대의 낭만과 감성을 자극하는 대중음악 다섯 곡과 영주지역을 대표하는 선비들의 정신을 타임 슬립 방식(과거와 현재의 두 타임 라인을 넘나드는 플롯 방식)으로 엮은 뮤지컬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뮤지컬이라기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옛 선비들을 현재 상황으로 소환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노래가 있는 연극’에 가깝다. 다만 각 시대의 선비들의 가르침들 사이에 ‘길’을 주제로 하는 대중가요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크박스 뮤지컬로 부를 수는 있겠다.
그리고 이 작품이 의도하고 있는 바는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인생의 길을 말하고자 함에 있으나, 실은 뮤지컬의 눈높이가 젊은이들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 주크박스의 노래에서 읽을 수 있듯이 7080세대들의 정서에 맞추어져 있다. 박인희, 유익종, 최백호, 프랭크 시나트라, 강산애 등은 전형적인 7080세대의 낭만과 감수성을 대표하는 가수들이고, ‘바람의 노래’(2017)를 부른 소향은 이들보다는 다소 젊은 편에 속하지만 노래 분위기만큼은 다분히 7080세대적이다.
2025년의 길을 묻는 젊은이들 앞에는 본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길이 놓여 있지 않다. 또한 먹고 살기 급급한 서민들에게는 옛 선비들이 가르쳐 주는 길의 지혜가 피부에 닿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앞날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길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만큼 합리적이지 않다. 뜻하지 않는 자연재해가 발생하기도 하고,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기도 하고, 세계 저편에서는 느닷없이 전쟁이 발발하여 죄 없는 사람이 죽기도 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이 정치지도자가 되기도 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니 세상은 모순덩어리요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로버트 프루스트(Robert Frost)의 시 ‘가지 않는 길’에 나오는 여행자와 흡사하다. 우리들은 자신 앞에 놓인 두 개의 길 앞에 서서 둘 다 갈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는 여행자에 불과하다. 현실이 내가 뜻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내 앞에 주어져 있는 길을 선택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 내가 걸어가는 노란 숲속의 두 개의 길 중에서 결국 한 길을 선택했고 걸어가지 않는 길에 대한 미련과 회한이 남아있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내가 선택한 길이 어떤 가치가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함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