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경 (수필가)

해 질 녘 서천변을 걷는다. 가을빛만큼이나 고운 서녘 하늘이다. 벌겋게 번져가는 노을이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화려함이 남긴 해의 뒤태였을까. 강물 위로 붉음을 더 짙게 새겨놓는다. 태양이 하루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순간이다. 아무리 눈부신 태양이어도 끝이라는 마지막 관문 앞에선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해의 꼬리가 작아질수록 강물 위 붉음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끝에서 만나는 겸손이다. 서쪽 하늘, 소백산 자락으로 해넘이가 진행되면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11월 끝자락이다. 가을산이 불러들인 만산홍엽이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가지마다 마른 잎을 떨궈내느라 분주한 손길이다. 한때 세상 빛을 혼자 거머쥔 듯 화려한 꽃잎을 자랑하던 숲 아니었던가. 이제 그 절정의 시간을 뒤로한 채 나무들은 모든 걸 비우고 내려놓는 시간 앞에 서 있다. 비워내는 계절, 소유할 수 없기에 가질 수 없는 당연한 이치를 가을 끝자락이 돼서야 깨닫게 된다. 끝이 있다는 건 자유롭게 누비던 시간을 점검하면서, 내가 서 있는 현재의 자리를 좀 더 정확히 들여다볼 기회이기도 하다.

나무의 생을 생각한다. 연둣물을 시작으로 울창한 여름을 지나 풍성한 가을과 함께 북풍한설을 맞으면서도 희망의 끈만은 놓지 않았다. 기다림이 있는 곳엔 언제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른 잎이 매달린 곳, 가지 끝 떨쳐가 겨우살이를 준비하고 있다. 자연은 나이테로 생의 햇수를 더하지만 우리네 생은 후회와 반성, 설렘과 기대로 해를 더해가고 있다. 계획한 한 해의 점검은 늘 끝에서 이루어졌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컸고, 아쉬움이 컸기에 후회로 남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는 건 내려서는 걸 잊은 채 오르려고만 한 집착 탓이다. 집착만 내려놓으면 모든 걸 자유할 수 있음에도 손아귀에서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잇는 분기점으로, 어제의 반성과 내일의 기대가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끝에 서게 되면 어제의 삶을 매만짐으로 후회와 반성을 줄이고, 새로운 날에 대한 희망이다. 더불어 시작을 위한 다짐이 새겨지기도 한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착각에 빠져 때때로 끝을 잊어버리곤 한다. 끝을 미리 준비했더라면 아쉬움과 후회를 줄여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뒤늦은 후라야 그 이치를 깨닫게 된다. 지금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마지막과 시작의 경계를 생각해 볼 일이다. 끝은 물러설 곳이 없기에 다시 올라서야 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지점이다. 안과 밖, 겉과 속, 위와 아래, 이렇듯 두 지점을 잇는 경계에 서면 늘 마음이 경건해진다.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는지, 목적의식이 뚜렷해지면서 책임이 가해지기도 한다. 끝이라는 낱말만 들어도 오만 대신 겸손이 자리하는 이유다.

어떤 생명체든 끝은 늘 혼자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이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건 우주에 깃든 자연의 순리다. 끝을 맞이하고 시작을 여는 건 세상사 정해진 수순이다. 솟구치던 열정도, 겁 없이 달려들던 도전도 끝과 맞닿으면 유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끝은 끝난 게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선이다. 그 끝을 지나야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우린 잊어버릴 때가 있다.

시작은 언제나 출발선 위에 놓여 있다. 그래서 관심과 조명을 한몸에 받기도 한다. 하지만 끝은 잘 드러나지 않기에 눈에 띄지도 않는다. 끝을 지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뒤쪽보다 두드러진 앞쪽에 관심을 기울인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순 없다. 단지 끝을 통해 다시 일어설 용기, 다시 시작할 용기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서녘 하늘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태양이 내일은 거대한 모습으로 다시 떠오를 터, 마지막을 지나면서 맞게 될 출발선이다. 끝이 지나면 시작을 만날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이치가 만추의 계절에 더 크게 와 닿는 이유는 뭘까. 서천변에 내린 어둠은 내일을 부르는 빛, 그 빛 따라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펴리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리라. 찬란한 내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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