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요즈음 우리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로 ‘가짜뉴스’라는 말이 있고, 또 ‘팩트’라는 말이 있다. ‘팩트’라는 말은 가짜에 상대되는 진짜, 사실을 말한다. 그런데 진짜보다 가짜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가짜가 횡행(橫行)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방증(傍證)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가짜라는 말이 이렇게나 횡행할까? 여기에는 뭔가 진짜를 말하는 것보다 가짜를 말하면 자기에게 훨씬 유리한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로지 ‘의(義)’보다는 ‘리(利)’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줏대가 없는 사람들이 진짜보다 가짜를 말했을 때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에 가짜에 치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라 옛날에도 그러하였다. 하기야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옛날과 지금이 크게 다를 것이 있겠는가? 어찌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나 수단은 크게 달라지고 발전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의 측면에서 보자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래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어제보다 오늘이 달라지고 또 내일이 오늘보다 달라질 때 우리는 역사의 진전(進展)에 희망을 품고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가 언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역사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오늘의 이 시점을 냉정하게 관찰하면 분명 진짜보다는 가짜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듯하다.

가짜가 버젓이 행세하는 일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비운의 조선 중기 시인인 석주(石洲) 권필(權鞸:1569~1612)이 지은 「충주석(忠州石)」이란 작품에는 당시의 가짜를 두고 신랄(辛辣)하게 풍자하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忠州美石如琉璃(충주미석여유리) 충주의 좋은 돌은 유리와 같이 고운데

千人劚出萬牛移(천인촉출만우이) 천 사람이 캐내고 만 마리 소가 옮기네.

爲問移石向何處(위문이석향하처) 묻노라 돌을 옮겨 어느 곳으로 가는고?

去作勢家神道碑(거작세가신도비) 가서 권세가의 신도비를 만들지요.

神道之碑誰所銘(신도지비수소명) 신도비에는 누가 글을 짓는고

筆力倔强文法奇(필력굴강문법기) 필력이 굴강하고 문법이 뛰어나다.

 

皆言此公在世日(개언차공재세일) 모두 말하길 이 공이 살아있을 때

天姿學業超等夷(천자학업초등이) 천품과 학업이 모두 출중하였나니

事君忠且直(사군충차직) 임금을 섬김은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居家孝且慈(거가효차자) 집안에서는 효성스럽고 자애로웠다.

門前絶賄賂(문전절회뢰) 문 앞에는 뇌물 청탁이 아주 없었고

庫裏無財資(고리무재자) 창고 안에는 쌓아둔 재물이 없었으며

言能爲世法(언능위세법) 그 말은 세상의 법이 될 만하고

行足爲人師(행족위인사) 그 행실은 남의 사표가 될 만하지.

 

平生進退間(평생진퇴간) 평생에 일신의 진퇴 거취가

無一不合宜(무일불합의) 하나도 도리에 안 맞는 게 없다.

所以垂顯刻(소이수현각) 그래서 이 비석을 세워서

永永無磷緇(영영무인치) 길이 사적이 없어지지 않게 한다.

此語信不信(차언신불신) 이 말이 사실인지 사실 아닌지

他人知不知(타인지불지) 다른 사람은 아는지 알지 못하는지

 

遂令忠州山上石(수령충주산상석) 마침내 충주 산 위의 돌들은

日銷月鑠今無遺(일소월삭금무유) 날로 달로 사라져 지금은 남은 게 없네.

天生頑物幸無口(천생완물행무구) 하늘이 돌을 낼 때 입 없는 게 다행이지

使石有口應有辭(사석유구응유사) 돌에 입이 있다면 응당 할 말이 있으리라.

 

석주 권필의 이 작품은 사실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신악부(新樂府)인 「청석(靑石)」을 본받아 지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백거이의 「청석」은 그가 남전산(藍田山)에서 산출되는 청석의 입장을 대신하여 말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석주의 이 작품 '충주석(忠州石)'도 유사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백거이는 안진경(顔眞卿)과 단수실(段秀實) 등의 충렬(忠烈)을 말하면서 당대 사람들과 이들을 대비시켜 세상 사람들이 충렬심(忠烈心)을 가지도록 하려는 의도로 쓴 것인데 반해, 석주는 오히려 당시 세도가(勢道家)들이 신도비를 만드느라 노역에 동원되는 백성들과 무참(無慘)하게 잘려 나가는 충주의 돌을 통해서 권세가의 무저학(無底壑) 욕심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권세가들이 실제 있지도 않은 공적(功績)을 날조(捏造)하고 가공(架空)하여 버젓이 비석에다 새기는 뻔뻔함과 허위의식(虛僞意識)을 가차(假借)없이 지적,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 「충주석」의 제1∼18구에서는 충주석을 빗돌로 다듬어 실어 나르는 상황의 묘사, 세태에 아부하는 몰지각한 문장가들에 대한 비판, 오언구(五言句)를 이용하여 신도비문에 상투적으로 쓰는 말을 반어적(反語的)으로 조롱(嘲弄)하고 있다. 제19∼24구에서는 그 비문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세도가의 위선(僞善)을 꼬집고 있다. 그리고 제23~24구는 백거이가 「청석」에서 “남전산의 돌은 말을 하지 못하니 내가 대신하여 말하리라.(石不能言我代言)”라고 한 구절을 석주 나름대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노릇하고 진짜보다 가짜가 더 큰소리 치는 세상이 많은 모양이다. 정말이지 가짜가 진짜보다 더 돋보이고 판을 치는 이런 세상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가짜가 퇴조(退潮)하고 진짜가 활약하는 세상은 모름지기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만들어야 한다. 선비정신을 가진 시민이라면 두족이처(頭足異處)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가짜보다 진짜를 말해야 하고 진짜가 자리 잡도록 가짜를 몰아내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석주의 「충주석」처럼 가짜를 버젓이 표방하는 물건이 있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박살(撲殺)을 내어야 할 것이다. 다시는 진짜를 밀어내고 가짜가 자리 잡지 못하도록 시민 모두가 나서야 할 일이다. 선비의 고장에 사는 우리 영주 시민 선비들은 이래저래 할 일이 많다는 자각을 확실하게 하고 조그마한 일부터 하나하나 선비정신을 실생활 현장에서 실천에 옮겨야 하겠다. 그래서 다시는 가짜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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