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학년 2학년 4학년’... KBC 성인학습자 공모전 대상 수상

정은미 씨와 함께 간호사를 꿈꾸는 자녀들
정은미 씨와 함께 간호사를 꿈꾸는 자녀들

자녀들과 같은 대학에서 함께 간호사 준비하며 제2의 인생

220명 중 6등...늦은 만큼 절실함에 발현된 성실함과 열정

근거 기반 간호 행위와 환자와의 신뢰 쌓는 간호사 되고파

시대는 빠르게 변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는 또 다른 미래가 올 것임을 우리는 은연중에 모두가 알고 있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대학교, 특히나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은 인생의 성공과 직결되는 것처럼 인식됐다. 대학생은 소위 엘리트로 불리며 지적인 능력과 사회적 책임을 가진 존재로 주목받았다.

물론 비싼 등록금 탓에 많은 이가 경제적 문제에 부딪혀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상위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대학이란 단순한 학문적 공간을 넘어 정치적 각성, 사회적 이동, 문화적 성장의 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누구나 대학교 졸업장 하나쯤은 있어야 할 만큼 흔한 종잇장이 됐고, 좀 더 나은 직장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대학의 문턱이 낮아진 요즘, 다시 공부하고자 하는 만학도가 늘었다. 어려웠던 시절,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루지 못한 학문의 열정이 연륜을 발판 삼아 다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세 아이의 엄마, 다시 대학생이 되다

지난 9월, 경북전문대학교에서는 재학생 중 만 35세 이상의 성인학습자를 대상으로 입학 동기, 대학생활의 즐거움, 제2의 삶을 위한 도약 등을 주제로 수기문, 숏폼, 동영상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공모했다. 총 27명이 참여한 이 공모전에서 간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정은미(50) 학생이 ‘우리는 1학년 2학년 4학년’이라는 제목의 수기문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정은미 씨
정은미 씨

정은미 씨는 1993년 불어불문학을 전공해 졸업한 후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았다. 그러니 지금 두 번째 대학생활을 하는 셈이다. 그녀가 30년이 가까운 세월을 지나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하며 새로운 길을 나서는 이유는 간호사에 대한 열망 하나였다.

정 씨의 도전은 단순히 나이 든 학생의 늦깎이 대학생활을 넘어 가족의 응원에 힘입어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그녀의 뜨거운 열정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정 씨의 첫 번째 대학 생활은 취업이나 뚜렷한 진로에 관한 생각 없이 진학 자체에 목표를 둔 선택의 결과였다. 그러나 가정을 꾸리고 세 아이를 키우며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면서 친분을 쌓던 간호사 동료들이 그녀의 학문에 대한 열망을 깨웠다. 위급한 상황에 의료인들과 함께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간호사들의 모습을 동경하던 그녀는 문득 도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 꿈을 이루기까지 걸린 시간은 5년이었다. 정 씨는 간호학과 진학을 여러 차례 남편에게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직 엄마가 필요한 아이들을 향한 현실적인 우려였다. 남편은 가족의 정서와 경제적 안정을 위해 그녀의 진학을 꺼렸고, 그녀는 해마다 같은 대답을 들으며 꿈을 계속 접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병원에 근무하던 옆자리 동료가 간호학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더는 주저할 수 없다는 갈망이 차올랐다. “지금이 가장 젊을 때이니 간호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는 그녀는 곧장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큰딸이 든든한 지지자가 돼주었다고 정 씨는 회상했다.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며 이미 의료계열이 탄탄한 진로임을 확신한 그녀는 큰딸에게 의료계 진학을 권유했고, 큰딸은 고민 끝에 간호학과에 진학해 이미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큰딸은 “엄마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다”며 그녀의 꿈을 응원했고, 고등학생이던 아들도 “나 또한 간호학과에 진학하고 싶으니 엄마가 빨리 입학해야 같은 학년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농담 섞인 발언으로 온 가족을 웃게 만들었고, 남편 역시 가족 모두의 응원에 더는 반대하지 않고 정 씨의 편에 서게 됐다. 그렇게 정 씨는 가족의 든든한 지원 속에 두 번째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정은미 씨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정은미 씨

만학도가 가진 최고의 무기, 성실함

정 씨가 입학한 2021년은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수업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병행되던 시기였다. “처음 시작한 1학년 생활은 매우 외롭고 힘들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나이 많은 학생은 동기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딸의 조언에 정 씨는 어린 동기들과 섞이기보다는 홀로 수업에 집중하는 것을 택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외롭게 수업을 듣는 시간은 만학도인 그녀에게 때론 고충이었다. 2학년이 끝나갈 무렵까지 병원에서 계속해서 간호조무사 일을 하고 있어 병원 측의 배려로 나이트 근무를 하면서 학교와 병원을 오가야 했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정 씨는 “밥을 못 먹는 고통보다 잠을 못 자는 고통이 크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정 씨는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성실함과 노력으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기 위해 매 수업에 최선을 다했다. 첫 학기 시험에서 그는 220명 중 6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이러한 성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성적 장학금이 나이가 많다는 약점을 가진 나를 더욱 강하고 당당하게 만들었다”며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한 학교생활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성적 장학금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소중한 발판이 돼주었고, 그녀는 “성실함이야말로 만학도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생각하며 학업에 열정을 더욱 쏟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현재 총 4년간 누적 석차 3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학년이 된 정 씨에게 더없이 특별한 일이 생겼다.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약속대로 정 씨와 같이 간호학과에 입학해 1학년 신입생이 됐고, 이미 졸업을 앞둔 큰딸은 4학년 선배가 돼 가족이 모두 한 대학 한 학과에서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이다.

세 사람 모두가 같은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학업의 고충을 나누고 응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 씨에게 큰 힘이 됐다. “이를 통해 자녀들과의 유대감은 더욱 깊어졌으며, 간호학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졌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 씨의 학업과 실습 과정은 늘 치열했다. 대인관계가 중요한 간호학과 생활에서 그녀는 현역 학생들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학생이라는 이유로 거리를 두려 했지만, 3학년이 되면서 그녀만의 방식대로 대학생활을 누리기로 결심한 정 씨는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젊은 동기들이 함께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면서 진정한 동기로 받아들여졌다.

때로는 술자리에서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집에 동기들 또래 자녀들이 셋이나 있다 보니, 동기들과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소통이 활발히 이뤄지는 가정에 감사함을 표했다.

동기들과 함께 안동병원 실습에 참여한 모습
동기들과 함께 안동병원 실습에 참여한 모습
나이팅게일 선서식에 참여한 정은미 씨
나이팅게일 선서식에 참여한 정은미 씨

근거 기반 실무를 하는 간호사로 성장하고 있는 지금

정 씨는 학과 수업과 실습을 통해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다. 간호조무사 시절처럼 단순히 지시를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닌, 그토록 바랐던 근거를 기반한 실무를 해나가며 그녀는 그 지시에 담긴 간호 이론과 과학적 이유를 이해하게 됐고, 환자들에게 왜 이런 처치를 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근거를 갖춘다는 사실은 그녀의 학업을 더욱 보람차게 했다.

“이제는 단순히 간호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며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정 씨는 간호사로서 환자와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됐다.

졸업을 앞둔 그녀는 앞으로 정신보건 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 정 씨는 나이가 많은 간호학도들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고, 대부분 요양병원으로 취업한다는 것을 알기에 처음엔 다른 진로는 생각지도 않다가 마지막 실습이었던 정신병동에서 만난 환자들이 눈에 밟히고 마음이 쓰이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어 “그곳으로 내가 가서 일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연륜으로 환자를 경청하고 공감하며 환자와의 신뢰 관계를 잘 쌓을 수 있으리란 확신을 했다.

현재 정 씨는 1월에 있을 간호사 국가시험을 준비 중이다. 남은 학기를 마무리하고, 졸업시험에 무사히 통과해 국가시험을 치르고, 자신이 진정 필요한 병동에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만학도로서 나이는 여전히 그녀에게 넘기 힘든 벽이다. 대형 병원들은 나이 제한을 이유로 만학도 간호사 채용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러한 현실에 때로는 좌절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해 온 만큼 내가 필요한 곳에서 일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정 씨는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두 번째 대학 생활을 통해 다시 꿈을 찾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대학생활은 단순히 자격을 얻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다. 간호학을 통해 삶에 대한 통찰과 가족의 사랑을 느낀 그녀는 이제 간호사로서 다른 사람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정 씨는 “간호사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직업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가 중요하다”며 “만나는 환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시간이 쏜살같다는 표현을 흔히 쓴다. 쏜 화살과 같이 매우 빠르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화살이 단 하나일 것이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화살이 너무 빨리 과녁 어딘가에 꽂혀 소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음 화살을 꺼내 다음 목표를 향해 겨눠도 충분한 인생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우리가 쏠 수 있는 화살이 아주 많다는 뜻이 아닐까. 간호학도라는 새로운 화살을 꺼내 들어 다시 과녁을 조준하고 있는 정은미 학생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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