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경 (수필가)

지금 이산면 번계의 들녘은 황금물결이다. 긴긴 여름, 무더위를 이긴 수고가 땀 흘린 만큼의 결실로 돌아왔다. 살 오른 알곡이 고개 숙인 겸손을 평야에 펼쳐 보이고 있다. 자만해지기 쉬운 거드름을 일순간 몰아내는 순간이다. 내세우지 않기에 더 우러러보이는 풍경이다. 자연은 이렇듯 겸손의 메시지로 가르침을 전하니 그 속에서 배움을 얻는다.

고개 숙인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곳, 침묵 속 단아한 자태로 우뚝 솟은 곳, 이산서원이다. 이산서원 1558년 영천(옛 영주) 군수였던 안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전국 천여 개 서원 중 열네 번째이자 사액서원으로서는 여섯 번째다. 소수서원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지역민에겐 자부심이자 긍지다. 그에 비해 이산서원은 영주 지역의 첫 서원이자 사액서원임에도 소수서원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

흔히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지 왜 이산서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소수서원은 옛 순흥도호부의 서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이에 더해 이산서원은 영주의 첫 서원이면서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기, 두 서원은 영주의 양대 산맥을 이룰 만큼 활약이 컸다. 이산서원도 소수서원 못지않게 조명을 받아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시민들이 이산서원의 가치를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이산서원은 이황의 학문을 집대성한 <성학십도> 판각을 보관했을 만큼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퇴계 선생이 서원의 규약인 원규를 처음으로 내린 곳이기도 하다. 서원의 운영 및 유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들을 명문화했기에 전국 서원 원규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퇴계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도산으로 향할 때 이산서원에 들러 강론을 펼칠 만큼 애정을 보인 곳이다. 이산서원에 담긴 가치를 알고부터, 그 빛나는 이름 앞에 시민으로서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서원은 인재를 양성하고 선현을 배향하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하는 곳이다. 서원에서 누구를 배향하느냐에 따라 그 격도 달라진다. 위패를 봉안할 때는 서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가 단연 그 대상이다. 이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타계한 후 지방 유림이 서원 경내에 사묘를 세움으로, 이황의 위패를 최초로 봉안한 곳이다. 2021년 복설과 함께 선생의 제자인 소고 박승임, 백암 김륵도 함께 배향하게 되었으니 후학 양성을 위한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산서원의 원터(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구서원이라 칭함)는 휴천동 남간재 부근이었으나, 1614년 이산면 내림리로 이건하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이산서원은 지방 유림 세력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이후 2010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66호로 지정되었으나 영주댐 건설에 따라 수몰 지구로 편입되면서 지금의 위치인 이산면 석포리로 복설하게 된 것이다.

이산서원은 오랫동안 소수서원과 함께 위기지학에 의한 학문 정진 및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추로지향 영주가 인성교육의 중심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고루하고 식상함에 매몰돼 지역이 담고 있는 본연의 가치를 상실할 수도 있다. 전통문화를 현대 감각에 맞게끔 다양한 구상을 통해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활력의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선비가 세운 가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내일에 대한 기대였을 터, 이제 새로운 문을 열고 변화를 수용해야 할 때다.

이산서원은 우리 지역의 정신적 및 문화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복설된 경지당, 성정재, 진수재, 지도문, 관물대를 통해 당대 지역 유림의 후학 양성을 위한 애정을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산서원이 강학 기능을 넘어 교육의 이정표가 된 점은 후세인들이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시민이라면 새롭게 단장한 이산서원을 방문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면서 그 가치를 다시금 인식해 볼 일이다.

이렇게 잘 복설된 이산서원은 이제 서원 본래의 기능을 뛰어넘어 시민과 함께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는 장소로 거듭나야 한다. 특정인만이 드나드는 곳이 아닌, 누구라도 부담 없이 드나드는 곳이어야 한다. 선비라는 프레임에 갇혀 현시대와 감각을 끌어안지 못한다면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면서도 그것을 즐기며 나눌 수 있는 여유를 보일 때 비로소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다.

노란 들녘에서 희망을 본다. 자 모이자, 이산서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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