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복 (소백산백년숲 사회적협동조합 이사)

오늘은 음력으로 9월 20일이다. 뜨물 같은 안개에 잠긴 낙엽송 가지가 흔들리고 가을비가 내린다. 초여름부터 두 달을 연일 비만 내리고 이후로 혹독하게 가물었다. 마당 앞 비탈에 심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말라 죽었다. 15년 전에 5년 생쯤 되는 것을 심었었다. 20년을 살았는데 긴 장마에 이은 가뭄을 이기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

옛날 사람들은 계절이 정해진 대로 조화롭게 진행하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했다. 태양과 태음의 기운이 교차하며 순조롭게 운행해야 초목이 자라고 곡식이 여물어 세상이 화평하리라 여겼다. 홀수 달은 양의 달이다. 양의 달에 겹치는 날은 특별히 양의 기운이 성하다고 여겨 명절로 쇠었다.

정월 초하루는 설이고, 3월 3일은 삼짇날이요, 5월 5일은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요, 7월 7일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석날, 9월 9일은 양의 기운이 절정에 달한다는 중양절이다. 모두 양기가 중첩하는 날이지만 9월 9일을 특별히 중양절이라 하며 국화주를 마시고 수유(茱萸) 열매를 머리에 꽂아 건강과 복을 빌었다.

영주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초파일에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인근 절에 나들이 갔었는데, 한 아주머니가 궁궁이 가지를 가져와 여럿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봄에 돋아나는 궁궁이 가지를 머리에 꽂으면 한 해 동안 병마와 재액을 막아준다고 했다. 쌍화차 냄새가 나는 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요즘은 머리에 꽃을 꽂았다면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이란 이상한 관념이 있지만, 옛날부터 수유나무 열매을 머리에 꽂으며 형제들과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며 지은 왕유(王維)의 시나, 머리에 석남(石南)의 붉은 가지를 꽂아 사랑을 표현했던 신라 사람 최항의 이야기를 보면 머리에 좋은 것을 꽂아 건강을 기원하고 재액을 막아줄 것을 비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유나무는 중국과 우리나라에 분포한다. 다 자라면 키가 7m에 달하는데 7월 장마철에 꽃이 펴 9월에 익는다. 씨앗에 기름이 많아 머릿기름이나 등잔불을 밝히는 데 쓰인다. 소동백(小冬柏)이라고도 한다. 꽃에는 꿀이 많아 양봉가들이 좋아하는 나무다. 표준 식물명은 “쉬나무”라 하는데 수유나무의 발음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수유나무는 운향과 식물이다. 운향과에는 귤, 오렌지 등 과수도 있고 산초나무와 초피나무가 있다. 수유나무 열매도 산초나무 열매처럼 오골오골 모여 달리는데 낱알 크기가 나물콩 만하다. 붉게 익은 열매를 머리에 꽂으면 재액이 물러난다고 했다.

九月九日憶山東兄弟(구월구일억산동형제)

獨在異鄉爲異客(독재이향위이객) 每逢佳節倍思親(매봉가절배사친) 遙知兄弟登高處(요지형제등고처) 遍插茱萸少一人(편삽수유소일인)

고향 떠나 타향에서 외로운 신세/명절이면 매번 부모 생각이 절로나네/형제들이 산에 올라 머리에 수유 열매를 꽂아 주다가, 한사람 없는 줄을 알겠지. - 王維왕유

당나라 시인 왕유는 산동山東 사람이다. 15세부터 장안에서 공부하고 벼슬 살았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살았으니 얼마나 그립고 외로웠을까. 명절이면 형제들을 추억하며 그리움을 달랬다. 산동에서는 구월 구일 중양절에 형제들이 산에 올라 수유 열매를 서로의 머리에 꽂아 주며 재액이 피해가기를 기원했었다.

형제 수만큼 가지를 준비해 머리에 꽂아 주는데, 하나씩 다 꽂았는데 하나가 남는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이다. 풍속을 모르면 읽어 낼 수 없는 숨은 그림이다. 遍插茱萸少一人(편삽수유소일인), 왈칵 쏟아지는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다.

구월 구일 중양절이 지나니 쓸쓸하고 흐리고 비가 내린다. 순리를 따르지 않고 끝끝내 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추수할 때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였으나 이제 때가 되었으니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하셨다. 가라지 불태울 촛불을 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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