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복 (소백산백년숲 사회적협동조합 이사)

9월 17일, 오늘은 추석이다. 가족들이 고향에 모여 조상님께 차례 지내고 성묘도 하는 날이다. 어느 시대나 힘든 사람들이 있다. 교통이 발달한 요즘은 여비가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1970년 추석에 천상병 시인은 정말 노자가 없었던 것 같다.

동백린사건은 1967년 6월 8일에 있었던 대선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잠재우고 10월 유신을 통한 영구집권하려던 박정희 무리가 꾸민 조작사건이다. 박정희는 200명이 넘는 인사들을 중앙정보부에 잡아다 고문해 간첩으로 몰아 사회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여세로 10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정치를 파탄내었다.

천상병은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점심 한 끼, 담배 한 갑과 차비를 갈취하곤 했었다. 그의 친구를 감시하던 자가 그것을 보고 천상병이 공작금을 받고 지령을 받았을 것이라며 잡아다 가두고 고문했다. 무려 6개월 동안이나 감금하고 닦달하고 심지어 전기고문까지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는 정권이 만든 조폭과 다름없었다. 잡아다 고문하는 과정에 영장은 고사하고 기록조차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감금돼 고문당하다 어느 골목에 정신 몽롱한 채로 천상병은 버려졌다.

소릉조(少陵調) - 70년 추일(秋日)에

아버지 어머니는/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가지 못한다.//저승 가는 데도/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가지도 못하나?//생각느니, 아,/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소릉조는 1970년 추석에 쓴 시다. 고문 후유증으로 악몽에 시달리다 문득 돌아온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썼을까. 「귀천」, 「들국화」 등이 이 시기 지어진 시다. 천길 깊은 아래가 투명하게 보이는 살얼음판 위를 무섭다고 울며 걷고 있는 것만 같다. 깊이를 모르는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외로움에 얼마나 치 떨었을까.

당나라 때, 안사의 난으로 현종과 양귀비가 피난 가는 와중에 고향에 들른 두보는 굶어 죽은 자식의 소식을 전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가족들을 만났다. 망해가는 나라의 운명처럼 두보의 인생 후반은 힘들었다. 그 힘든 시기를 견뎌낸 선배로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해일에 휘말려 희미해진 정신을 순간이라도 붙잡게 해주었던 것이 두보였을까. 고향에 가지 못하는 외로움을 두보調로 읊었다고 제목을 소릉조(少陵調)라 붙였나. 두보의 호가 少陵野老(소릉야노)다. 소릉 들에 사는 늙은이란 뜻이다.

역사는 악을 극복하고 물리치며 진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악에 눈감고 외면하고 동조하는 마비된 양심이 잠에서 깨어날 때 반 발 앞으로 가는 것이다. 여비가 없어서 고향에 가지 못하는 대야에 갇힌 물고기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를 유영하다가 들여다보는 이들의 양심에 찬물을 끼얹는 것만 같다.

천상병은 그때 끌려가 당한 일의 참상을 말하거나 글로 쓴 적이 없다. 다만 사랑하는 아내를 뜨겁게 안아주지 못하는 사내의 마음을 시편 한 줄에 소심하게 읊었을 뿐이다. 천상병을 읽을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저 아름다운 이의 후손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냐. 전기로 어떻게 지짐질을 했길래 저리 상했을까.

여비가 없어 형제들에게 가지 못했던 천상병의 시를 읽으며 명절 인사를 전한다. 언제 무슨 독한 재난이 닥쳐도 이상할 게 없는 세상이다. 조금은 불량스럽고 삐딱하게 명랑해지자.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이라고 느껴질 때, 기억해라. 모두가 소풍이라는 것을. 소풍 나온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닥친들 설레지 아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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