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시인)
밤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알람처럼, 쉼표처럼
다시금 추석이 다가옵니다. “앉음앉음이” 달랐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향으로 발걸음 사뿐하게 달리겠지요. 생각만으로도 미간이 툭툭 펴집니다.
고향! 지키는 사람들이나, 돌아오는 사람들이나, 어쩌다 오가는 사람들이나 뻣뻣한 가면을 벗고 잠시나마 마음 놓을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추석 같은 큰 명절이면 팔짝 뛰며 날아다니는 아이들의 신발, 뚜껑을 열 때마다 김이 가득한 솥처럼 아닌듯하면서도 부푸는 설렘과 정감이 살짝 눈물겹습니다.
눈물겨운 것이 어디 그것뿐일까요? 추석을 맞아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 만나는 밤송이도 아이들에겐 큰 즐거움이 됩니다.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한 알밤을 까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듣는 조상들의 배는 저절로 부르겠지요.
고개 숙여 선 조상의 무덤 앞에서, 저마다의 조상을 생각해보는 것 또한 추석이면 하는 중요한 일이지요. 살아있는 모든 것이 기적이듯, 죽어간 모든 것들은 그 기적을 만든 근거일 테니까요. 빈곤의 마당이든, 눈부신 금자탑이든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어요.
빨간 날짜가 연이어 찍힌 달력을 보며, “내 생애의 껍질을 까”다 만난 이번 명절도 풍성함 가득가득 누리길 소망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