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24년은 8월 폭염일수가 역대 최대를 기록한 해이다. 벌써 입추와 처서가 지났지만, 기상청 일기예보에 따르면 9월 초는 돼야 비로소 무더위가 한풀 꺾일 기미가 보일 것 같다. 가을이 되면 70년대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안톤 슈낙(Anton Schnack)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이 생각난다. 이 수필은 이렇게 시작된다.
“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초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 한 모퉁이에서 오색영롱한 깃털의 작은 새의 시체가 눈에 띄었을 때. 대체로 가을철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많이 있다. 혹자는 최근 8월 15일에 있었던 광복절이니 건국절이니 하는 해묵은 시비로 인해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모습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직하게 표현하면 이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분노케 한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타자를 향해 분노하는 것은 또 타자의 상대적인 분노를 낳기 때문에 이것은 슬픈 것이 아니라 모두를 분노하게 한다.
진정한 슬픔은 인간 존엄에 대한 상처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원초적 연민의 정이다. 예를 들면, 며칠을 굶었는지 피골이 상접한 어린아이의 눈물, 인적이 끊긴 시골 오두막집에 홀로 누워서 외로움에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의 야윈 손, 허름한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훔친 빵 한 조각을 허겁지겁 먹는 걸인의 뒷모습들이 진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먹고살 만한 세상이 돼 그런지 대부분 사람은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삶보다는 연예인들이 사들인 삐까번쩍한 건물에 더 관심이 많다.
우리 영주지역에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어떤 사회적 도움이나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얼굴 없는 사람들, 우리들의 삶 속에서 노출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풍요의 계절 가을을 맞았음에도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뿐더러 자식들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노인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이 자녀들로부터 돌봄을 받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023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평균 독거노인 비율이 21.1%에 달한다고 발표됐다. 하지만 시골의 경우는 거의 절반 이상이 독거노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인 대부분은 비록 하루에 3~4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노인 장기 요양보험공단으로부터 받기가 너무 어렵다는 데 있다. 특히 영주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등급을 안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누가 봐도 가사(취사, 청소, 주변 정돈, 생필품 구매 등)와 청결(샤워 및 배설, 세면, 머리 감기, 구강 관리, 화장실 이용 등) 그리고 일상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 도저히 생활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는 이들에게 장기요양등급을 발급해 주지 않고 있다. 지자체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노인맞춤돌봄서비스를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반문할 수 있지만, 노인맞춤돌봄서비스는 상시로 돌봄 서비스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서비스 시간이나 내용상 분명히 한계가 있다.
최근에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지 고작 한 달 만에 돌아가신 어르신도 있었다. 또 동맥경화증이 심각해 운신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어르신이 집에서 상시적으로 돌봄을 받으면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등급을 받지 못해서 급기야 입원해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례도 있다. 이런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단 한 명일지라도 소외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사회가 모두가 꿈꾸는 사회일진대, 오히려 사회적 약자가 알게 모르게 외면되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