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제, 그늘진 곳에 사랑의 빛을 전파하다”
가톨릭 정신으로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농민 인권부터 예술문화 전파까지 전인격적 복지 지향
나병 혹은 한센병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공포 대상이었다. 환자에 대한 편견은 오랜 시간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요인으로 형성돼 환자들에게 심각한 낙인과 차별을 가져왔음은 물론 한센병이 전염된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환자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됐다. 종교적 또는 문화적 오해로 한센병을 신의 벌이나 저주로 여기는 경우도 많아 더욱 낙인찍히고 차별받았다.
법적 차별도 있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한센병 환자를 격리하고, 취업이나 결혼에서 차별했다. 현대에는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같은 국제기구가 한센병에 대한 인식 개선과 조기 발견, 그리고 치료를 촉진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등 많은 나라에서 법적·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1971년, 6·25전쟁 종군 간호장교였던 벨기에 출신 데레사 캄비에는 우리 고장 영주에 다미안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했다. 1973년에 병동과 부속건물을 짓고, 1974년부터 한센인에 대한 입원치료와 외래진료를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78년 10월 한센인 복지시설인 ‘다미안의 집’을 준공해 입소 치료를 시작했고, 1988년 외래 진료까지 가능한 의료시설까지 모두 갖춘 것이다. 1991년에 사회복지법인 다미안의 설립 인가를 받아 1997년 ‘사회복지법인 천주교안동교구사회복지회’로 개칭했다.
다미안의 집은 2019년 3월 31일 운영을 중단하고 남아있던 소수의 한센병 환우들을 소록도 등으로 이주시켰으며, 2019년 5월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더사랑의집’으로 허가를 받아 운영 중이다.
가난한 사제,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다
천주교안동교구사회복지회 대표를 맡고 있는 김학록(66) 신부는 고교 시절 기도하는 삶을 꿈꿨고 매일 새벽 기도로 아침을 열면서 성직자가 될 결심을 했다고 한다. 김 신부는 고교를 졸업하면 바로 수도원에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신학대 진학을 결정했다.
1978년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진학해 1986년 사제 서품을 받은 김 신부는 신학교 생활을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았던 내적 갈등과 고뇌를 마주한 시기라고 회상했다. 그때 사제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고찰했고, ‘가난한 사제’, ‘인간미 있는 사제’, ‘기도하며 공부하는 사제’라는 막연한 삶의 목표를 세웠다고 했다.
사제 서품을 받은 그해 안동 목성동주교좌성당 보좌신부로 발령받아 성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상주에 위치한 서문동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천주교 농민 단체인 가톨릭농민회와 함께 농협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농민들의 고충을 함께 나누고 권익을 위해 힘썼다.
1988년에 영양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서도 그는 지역민들의 권리를 찾아주고자 무던히 노력했다. 그곳에서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도 진심을 다하고 농민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다.
1990년이 되던 해, 안동 태화동성당으로 온 김 신부는 영양성당에서 했던 교도소 사목을 계속해서 맡게 됐다. 청송교도소에서 3년간 사목을 담당했던 그는 안동으로 부임한 후 안동교도소에서 사목 활동을 계속했고, 성당 근처에 있는 양로원, 농촌공소, 무료급식소 그리고 나환자촌까지 돌보면서 사회복지를 중점으로 꾸려나가는 본당을 운영해 보고자 노력했다.
특히 소외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도직 단체인 ‘빈첸시오회’를 천주교안동교구 최초로 만들어 사회복지에 힘쓰는 성당을 만드는 것에 박차를 가했고, 본당에 사회복지부를 개설해 소외된 지역민들을 돕는데 적극 나서기도 했다. 천주교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의 담당신부로 일하면서도 농민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도움을 주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김 신부는 그때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 후 1995년 안동 구담성당으로 옮겨 안동 풍천과 예천에 있던 7개의 공소를 모아 성당 건물을 새롭게 지었다. 5년간 그곳에서 지내다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크라멘토란 도시로 파견됐다. 그는 그곳에서도 한인 사회와 함께하며 풍물패를 만들고 한국문화를 미국 본토에 알리는 등 우리 문화에 대해 한인들이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는 데 앞장서서 활동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교육을 맡았던 사람이 이민을 오면서 합류해 전문성을 다져 9·11테러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김 신부는 “농민회를 위해 일하는 내가 미국 쌀을 먹고 있다는 것에 간극을 느끼기도 했다”며 털털하게 웃어 보였다.
안동교구청으로 발령받아 사목국장으로 일하던 2002년에는 당시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한국 농업이 크게 뒤흔들린 탓에 ‘농촌이 죽으면 교구도 함께 죽는다’는 일념으로 농민 사목활동에 집중했고 농촌 살리기 운동과 더불어 농촌사회에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수강하는 등 농민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2006년 다시 본당신부로 의성성당에 부임한 그는 “적극적인 신도들 덕에 원했던 사회복지 활동까지 함께 재밌게 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김 신부는 생명과 환경 분야로까지 활동범위를 넓히고 싶은 마음이 커 EM용액(유익한 미생물을 조합·배양해 살균 및 악취 제거 등에 뛰어난 친환경 용액)을 만들어 지역민들에게 배포하기도 하고, 농산물매장을 만들어 유통망을 확보하고 농촌 일손을 돕는 등 농민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쏟았다.
이름뿐이던 의성성당 소속 풍물패를 활성화하고 사진 동아리를 만들기도 하며 지역 예술문화 확장에도 기여했다. 이에 더해 다문화가족 지원센터를 설립하고 장학회를 만드는 등 전반적인 사회복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10년 다시 교구청으로 간 김 신부는 사무처장 겸 관리국장을 역임했고, 2017년 지금의 천주교안동교구사회복지회 회장이자 장애인복지시설인 보름동산 원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잠시도 쉬지 않은 열정 속에 그가 목표했던 ‘가난한 사제’, ‘인간미 있는 사제’, ‘기도하며 공부하는 사제’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인생 여정이다.
‘다미안의 집’에서 출발한 사회복지법인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뒷받침하는 것에 목적을 둔 사회복지법인 천주교안동교구사회복지회는 앞서 언급했던 한센인 요양시설인 ‘다미안의 집’에서 시작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센인의 수가 줄어들고 시설 운영의 필요성이 줄어들게 돼 2019년 운영을 중단하고 남은 한센인을 소록도 등으로 이주시킨 후 중증장애인 요양시설인 ‘더사랑의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센인 의료시설은 이제 일반 사람들을 위한 일반 외래진료를 제공하는 ‘다미안의원’으로 개칭돼 현재도 전국에서 환자가 모여들 정도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김 신부는 “다미안의원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은 재단의 기초 운영자금으로 쓰이고 나환자정착촌과 법인 활동 지원금으로도 감사히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법인 산하에는 장애인복지시설 8곳, 아동·청소년복지시설 7곳, 노인복지시설 5곳, 가족복지시설 5곳, 지역복지센터 3곳, 여성복지시설 1곳, 한센인 정착촌 6곳 등이 있다. 천주교안동교구 중 최대 규모인 이 법인을 운영하며 김 신부는 “평생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킨 복지영역이 일정 체계 안에서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에 뿌듯함과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신학대 학생 시절에 굳힌 ‘인간미가 가득하며 항상 배우고 공부하는, 가난한 사제’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 신념에 걸맞게 그는 사회복지법인을 이끌기 위해 2018년 사회복지사 1급을 취득하기도 했다. 덧붙여 “큰 규모의 법인을 운영한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기에 실무자들이 항상 고생을 많이 한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 신부가 이 많은 시설을 이끌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표어는 ‘떳떳하고 당당하게’이다. 그는 “자긍심을 갖고 현재 펼치고 있는 활동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며 일관되고 꼿꼿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함께 일하고 있는 사회복지종사자들에게 늘 ‘부모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대할 것’을 강조하는 김 신부는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회복지 활동이 진정한 복지 실현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의 다미안의원과 그 일대가 한센병 환자 시설이라는 편견을 깨고, 사람들이 언제든지 방문해 편안히 쉬었다 가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산림청 사업 공모를 통해 아름다운 조경 공간을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현재 다미안의원이 있는 상망동에는 앞서 언급한 ‘더사랑의집’과 ‘보름동산’이 함께 있다.
또한 보름동산 뒤편에 위치한 마당에 쇄석을 깔고 장애인 자립을 위한 가사활동 체험존을 구성할 만큼 환경 조성에 진심이다. 김 신부는 이제 종교활동으로 시작한 크고 작은 움직임을 모아 지역사회가 편히 쉬고 갈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결국 사랑이다. 유일한 목표는 아닐지언정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랑은 여러 갈래로 발현된다. 우리 주변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연애 감정이나 선비정신인 효(孝), 충(忠)과 같은 것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는 다양한 사랑이 숨어있다.
인류를 향한 사랑이 소외된 이들에게 따뜻한 햇빛을 내려주고 복지 실현의 활동이 커져 우리 고장의 그늘진 곳에도 지금 늦은 봄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