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60이 넘어 들어선 가수의 길, 운명 같아요”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어디를 가든지 노래 ‘내 사랑 풍기’ 열창

고향홍보대사 역할 자임, 가수의 길 걸어

고향 영주 특산품 브랜드 가치 더 높였으면

inet 가요사랑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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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풍기’라는 노래가 있다. ‘그리운 고향 내 고향 풍기 (중략) 사과향기 인삼 내음 인견의 고장 (중략) 잊을소냐 (하략)’라는 가사가 트로트 풍으로 흐른다. 마지막엔 ‘잊을소냐 풍기 내 고향’이 후렴으로 반복된다.

올해 재경영주시향우회 신년회에서 이 노래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가수 염어진의 노래이다. 가수 염어진은 영주시 봉현면 두산리 출신이다.

그녀의 고향 사랑은 각별하다. 어릴 적의 추억을 자세히도 기억하고 친구들의 이름도 줄줄이 꿴다. 노랫말 속 가사처럼 고향의 특산품은 염어진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고향에 들리면 예전 살던 집을 둘러보곤 했다. 고향에 집을 마련하려고도 했다. 그런 마음이 고향 영주를 향한 사랑으로 녹아들었나 보다.

지난 22일 금계중학교 2024년 총동문회 행사에 참석해서도 ‘내 사랑 풍기’를 열창했다. 가수 염어진의 인터뷰는 금계중학교 동문 행사가 끝난 뒤에야 할 수 있었다.

고향 방문을 환영합니다. 어디서 태어났나요? 형제자매는 몇인가요?

봉현면 두산리 102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는 6남매였습니다. 아들 둘에 딸 넷입니다. 제 위로 오빠가 있고 줄줄이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막내가 남동생입니다.

초등학교는 어디서 다니셨나요?

집에서 가까운 봉현서부초등학교를 입학해 다니다 2학년 때 풍기초등학교로 전학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영전사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했거든요. 당시로선 대궐 같은 집이었습니다.

중학교까지 고향에 계셨나요?

금계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갔습니다. 당시 풍기중학교를 다니던 오빠가 공부를 잘했습니다. 아버지도 사업장을 서울로 옮기고 오빠도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당시 저는 중학교 3학년 1학기였는데 1년 가까이 가족끼리 친했던 김이호(현 금계중학교 재경동문회장)의 부모님께 의탁해 있다가 졸업 후 가족과 합류했습니다.

위는 엄마 품에 안긴 어릴 때(옆은 이모) 아래는 살던 집
위는 엄마 품에 안긴 어릴 때(옆은 이모) 아래는 살던 집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가수 생활하셨나요?

노래를 잘 부른단 평을 들었습니다만 가수의 꿈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보다는 미용사나 간호사로 일하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자 친구들처럼 대학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당시 외국에 돈 벌려고 가는 사람들처럼 저도 간호사로 서독에 가고 싶었지만 포기했습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이 부지런하잖아요. 놀다가 시집가기보다 일하고 싶었습니다.

미용실에 가서 일했습니다. 영등포 경기미용학원을 나오고 또 미용학교까지 나왔습니다. 그렇게 자격증을 따서 미용사로 일했습니다. 오류동 홍진미용실, 가리봉동 마샤미용실, 이모댁이 있는 망우동 고운미용실, 사당동 수지미용실 등 총 6개 미용실에서 일했나 봅니다. 미용 일을 하며 결혼도 했습니다. 임신한 상태에서 전문대에 진학해서 공부도 했습니다.

미용 관련 공부인가요?

부동산 관련 공부였습니다. 학위를 받으려 진학했다기보다 부동산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37살에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사당동에서 살 때였습니다. 그때 방배동 사시던 침술 선생님이랑 가깝게 지냈습니다. 제 아이가 갑자기 열이 40도까지 오를 정도로 아파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 치료받았으나 같은 병실의 다른 아이 보호자들이 다들 며칠 못 넘기겠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살렸습니다. 그분은 병원에서 포기한 사람들도 살렸다고 해서 유명했습니다.

따님을 고쳐준 은인이시군요. 그분에게 침술을 배우시지 그랬어요?(함께 웃음)

침술은 못 배웠습니다. 저는 27살부터 그분을 ‘엄마’라 부르며 지냈거든요. 그분의 별장이 제주도에 있었습니다. 그분 권유로 제주도 한 달 살기 하러 제주도에 갔습니다. 한 달 살기로 갔는데 옆에 집을 얻어주시고 같이 살자는 권유에 23년을 제주도와 서울을 왕복하면서 살았습니다. 아이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니 서울 생활을 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제주 생활을 거의 정리했습니다.

이제 고향에 돌아오시지요.

고향 생각은 늘 떠나지 않았습니다. 영전사 옆에 있던 옛집은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집을 되살려고 가 보기도 했습니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무영사진관집 딸 이영란(작고) 언니와 함께 찾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옛집은 헐리고 새집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참 허무하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태어나 자란 봉현 두산리 옛 집터에 집을 지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근처에 큰댁 작은댁이 있고 할머니와 부모님 산소도 있는데... 중앙고속도로가 들어선 뒤라 소음이 너무 심했습니다.

포기하는 대신 고향 이야기를 더 자주 합니다. 살던 동네의 꼬불꼬불한 골목길, 걸어서 소풍을 갔던 희방사, 금선정, 소수서원 이야기도 하고 증기기관차가 다닐 때 죽령터널을 지나면 날리던 새까만 먼지와 급수탑 이야기 하고, 조영주 선생님과 다니던 비로봉과 소백산 철쭉도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고 지장원 선생님이 ‘내 사랑 풍기’를 작사작곡해 선물로 주셨습니다.

고향사랑 노래 ‘내 사랑 풍기’가 탄생하게 된 비사를 들었습니다. 뭉클한데요.

그 노래를 해보니 작곡가 선생님이 왜 좀 더 일찍 가수의 길을 가지 않았냐며 아쉬워하시더군요. 매일 밤낮으로 불렀습니다. 엄청 불렀습니다. 꿈에서 부르기도 했는걸요(함께 웃음). 그 뒤 녹음했습니다.

그렇게 가수 데뷔를 했군요. 늦은 나이에 가수 데뷔...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군요.

사실 아버지가 노래를 잘하셨어요. 마을 잔치에서도 노래 부르고 콩쿠르대회에 가시면 1등상을 받아오시고.. 노래를 부르는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수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노래를 좋아하지만, 가수는 아니거든요.

제주도 살 때 어떤 사모님이 노래를 CD에 담아오셨는데 노래는 수준급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좋아하는 게 노래인지라 CD를 만들었던 거지요. 저도 CD를 내고 싶었습니다. 노래에 자신도 있고요.

2024재경영주시향우회(옆은 봉현 두산리 출신 이영환 대표)
2024재경영주시향우회(옆은 봉현 두산리 출신 이영환 대표)

노래 부르는 게 어렵지 않나요? 나이 60 넘어 시작한 가수... 요즘엔 60이 새 시작 시점이란 말도 있지만... 혹시 늦은 나이라 고민이 많지 않았나요?

저는 노래 부르는 게 좋아요. 제주도에 살 때도 차 속에서 혼자 노래 부르고 찬송가도 50곡 100곡 혼자 불렀지요. 밤 새워 노래 불러도 목이 아픈 적이 없었어요. 신기했습니다. 60세 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저는 늦었다는 고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분들 중에 고향에 계시는 분이 있나요?

현재는 없습니다. 큰댁 작은댁이 두산리에 있고 태장에 외삼촌이 계십니다. 여동생 셋은 외국에 살고요. 오빠와 남동생 그리고 저는 한국에 삽니다.

고향에서의 추억을 소개하시면?

어릴 때 인삼조합에서 삼을 깎는 엄마 옆에 놀던 막내 남동생을 돌보기 위해 리어카에 태워 가다 동생 다리가 바퀴에 쓸려 피가 났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4,5학년 땐 집에 목욕탕이 있음에도 친구들이랑 남원다리 아래서 트럭 바퀴 튜브에 바람을 넣고 안정까지 물길 따라 떠내려가듯 수영 후 지나가는 트럭에 태워달라는 손짓도 했습니다.

순흥통로 싸전거리 강원연탄(지금은 없어짐) 근처 뻥튀기 장사, 약장사, 공동화장실, 공동우물터도 생각납니다. 아버지 친구인 학교 손인규 선생님께 친구 10여 명이 과외수업도 받았던 기억도 납니다.

사은품 부채에 고향 사랑을 담다
사은품 부채에 고향 사랑을 담다

‘내 사랑 풍기’를 많은 사람이 부르고 감상하길 바랍니다.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저는 달려갑니다. 지역방송에 초대받아 가서도 불렀습니다. 지난해 영주시 대표로 올림픽 복싱경기장에서 4,5천 명의 경상남북도민이 모인 행사에서도 영주시 대표로 불렀습니다. 곧 광화문에서 개최되는 영호남화합의 모임에 가서도 부를 예정입니다.

버스킹을 하는 곳에서도 부릅니다. 은행나무 축제 등 여러 축제와 크루즈 여객선, 베트남 가서도 불렀습니다. 유튜브에서 ‘좋아요’가 가장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미아리, 수유리에서는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시장에 가면 많이 알아보십니다. 관악산 등산 후 노래방에 갔더니 ‘내 사랑 풍기’를 부르는 등산객들이 있다길래 기뻤습니다.

영주의 공직자 또는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초등학교 3,4,5학년 때 자주 들었던 아버지 말씀이 생각납니다. 풍기역 근처에 여관이 많았는데 인삼 수확철이 되면 금산 상인들이 많았답니다. 그들이 풍기 삼을 사서 품질 좋은 금산인삼으로 판다고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생산지의 브랜드로 나가지 않는 게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고향의 마케팅력이 더 좋아졌으면 합니다. 영주에서 나는 인삼, 인견, 사과, 쇠고기 등 특산품의 브랜드 가치를 더 높였으면 좋겠습니다.

염어진 가수께 고향 홍보 더 부탁합니다.

당연하지요. 고향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고향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가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풍기역 대합실에서도 은은한 볼륨으로 ‘내 사랑 풍기’와 같은 노래를 계속 틀었으면 좋겠습니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그 노래 가사를 한 사람이라도 더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는 계속 고향의 홍보대사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가수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가수 염어진 프로필

- 봉현면 두산리 출신

- 봉현서부초등학교 입학, 풍기초등학교 졸업

- 금계중학교 졸업

- 제주산업정보대학 부동산컨설팅과 졸업

- (현) 가수, 대표곡 ‘내 사랑 풍기’ ‘당신은 별빛’ 외

- (수상) 각종 가요제 수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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