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과 고향의 접점이 많이 생기면 ‘애향심’도 더 커진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독립지사인 선친(고 송지영 지사) 영향 광복 관련 활동 ‘적극’

광복단 기념공원 비롯 문화유적 등 역사 물줄기 자부심 느껴

보존됐다면 이채로운 풍기의 돌담과 토성이 사라져 아쉬워

 

1961년 중학교 2학년 희방사 소풍(왼쪽이 친구 이기섭, 오른쪽이 김정철선생님)
1961년 중학교 2학년 희방사 소풍(왼쪽이 친구 이기섭, 오른쪽이 김정철선생님)
광복회원들과 파주시 율곡 이이 유적지를 찾았을 때
광복회원들과 파주시 율곡 이이 유적지를 찾았을 때

송재호 박사는 독립운동을 기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애향인이다. 광복회 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독립유공자유족회 이사와 광복회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송 박사를 지난달 19일 풍기역 앞 카페 기주고을에서 만났다. 그는 고향집에 자주 내려온다. 고향집이 풍기읍 공원산 바로 아래다. 행정구역상 금계1리이다. 그의 고향집과 풍기역이 가까운지라 풍기역 앞 카페 기주고을을 약속 장소로 정했다.

송 박사는 고향집에 들리면 친구와 함께 영주 곳곳을 다닌다. 고향의 향토사에 관심이 크다. 이 지역을 빛내는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찾는다. 그 유산이 갖는 현대적 의미에도 관심이 깊다. 그는 또한 이 지역을 빛낸 회헌 안향, 근재 안축, 신재 주세붕, 퇴계 이황, 금계 황준량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는 질문에 답하다 오히려 기자에게 질문도 많이 했다.

저명 언론인이었던 선친(독립유공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송지영)을 둔 사람답게 옛 영주 역사와 유적 그리고 현 영주 소식에 대해서도 질문을 겸한 이야기를 했다. 매주 빠지지 않고 발행되는 영주시민신문의 소중함도 이야기했다. 그만큼 그는 고향에 관심이 크며 고향 사랑이 깊다. 특히, 독립운동 유적지에 대한 그의 관심이 컸다.

인사를 나누고 그가 먼저 날씨 이야기를 했다.

5월 16일 새벽 소백산 봉우리에 눈이 내렸습니다. 올해는 5월 중순에도 눈이 내리는군요. 강원도엔 평지에도 눈이 왔다지요?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란 말이 있는데 걱정입니다.

고향집에 자주 오시는지요?

공원산 아래 고향집이 있는데 누나가 혼자 기거하다 지금은 서울에 가 있습니다. 저는 자주 내려와서 머물곤 합니다. 바로 옆에 고모님이 사십니다.

제가 사는 동네 교회에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수년 전부터 고향집에 와 있을 땐 금계교회에 갑니다. 어릴 때 소풍 가던 금선정에도 들립니다. 몇 해 전 금계교회 마을의 금양정사에 들렀는데 어른 한 분이 지키고 계시더군요.

금계교회 신우들과 함께
금계교회 신우들과 함께

금양정사와 금선정 외에 가 보신 곳이 많은지요?

그럼요. 고향에 올 때 여러 곳을 찾아 들립니다. 동양대에 근무할 때도 그랬습니다. 우리 고향 주변에는 문화유적과 명승지가 많습니다. 그곳을 찾아보는 것은 제게 큰 보람이자 깊은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유산들을 활용한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데 보람과 의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향에 와서 친구들을 만나고, 또 같이 고향과 관련이 깊은 선현들의 자취나 유적에 대한 것을 접하는 것은 크나큰 소중한 경험입니다.

동양대에서도 근무하셨군요.

비서홍보실과 도서관에서 한동안 근무했습니다. 3~4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대한광복단기념공원이 바로 옆에 있지요. 고향에 오면 대한광복단기념공원에 들리곤 합니다.

선친이 독립운동을 하셨는지라 대한광복단기념공원은 더욱 관심이 크겠군요?

19세기 말경부터 20세기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일제의 부당한 간섭과 침탈, 병탄에 이르는 암울함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어둡고도 참담했던 비극의 시기였습니다. 이런 암흑의 시대였으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민중들의 국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졌다는 겁니다.

우리 지역엔 광복단 활동을 비롯, 많은 국권회복 운동과 이에 이바지한 고결한 애국지사가 다수 계셨습니다. 민족수난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역량이 강화되고 새로운 모습의 자주독립 역량을 배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으로 오욕으로 점철된 역사이나 이 또한 민족의 저력과 잠재적 역량이 최고도로 발휘된 시기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현재 광복회 대의원으로서 있으면서 광복단 등 독립운동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으며 이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풍기의 고향집에 들리면 대한광복단기념공원에 들러 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되새깁니다. 또 충절의 고장인 순흥에 들러 옛 선비들의 사적과 충신, 열사들의 내력들을 접하며 장엄한 역사의 물줄기에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양구 펀치볼 전투전적비 앞에서 양만진 김각래 광복회 회원과 함께
양구 펀치볼 전투전적비 앞에서 양만진 김각래 광복회 회원과 함께

광복단 활동, 저도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독립지사인 선친에 대한 말씀도 해 주시지요.

선친은 일제 강점기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기자로 활동하셨습니다. 동아일보 풍기지국 기자로도 활동하셨습니다. 그 뒤 중국에 가셔서 기자 활동과 광복 활동을 하셨습니다. 중국 남경에서 남경대학교에 입학하시면서 임시정부와 연락이 닿아 광복운동에 입문했습니다. 국내에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시다가 체포되셨습니다. 체포된 후 일본으로 압송되어 일본에 계시다 해방을 맞으셨습니다.

광복이 안 됐더라면 큰일 날 뻔했을 수도 있네요.

당시 같이 감옥 생활을 하신 분이 조선족 김학철, 김동철이 있습니다. 선친은 일본에서 석방된 후 귀국해서 풍기 금계동 집에 그분들과 함께 들러 며칠 같이 계시다 서울로 가고 또 풍기로 오시곤 했습니다.

부친이 평소에 어떤 강조하시는 것들이 있나요?

제게 특별한 당부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자간에 교감이 별로 없었단 생각도 듭니다. 다만,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거나 상대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셨습니다.

당시의 전형적인 아버지 모습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율성을 부여하시는 스타일이셨나 봅니다. 중학교 졸업 후 독립지사이신 선친이 계신 서울로 가셨나요? 서울로 진학은 드문 시절이었는데 공부를 잘하셨나 봅니다.

금계중학교 졸업 후 서울의 경복고로 진학했습니다. 당시 금계중학교 선생님들이 애정을 갖고 학생들이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그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금계중학교 개교 60년사에 싣기도 했습니다. 대학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로 진학했습니다. 독일은 그때도 지금처럼 선진국이었고 학문 특히 철학이 발달한 국가였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분단의 비극 속에 있는 나라이기도 했고요. 그런 점이 끌렸었습니다. 나중에 독일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독일 관련 전공인지라 그 뒤 무역회사에 근무도 했고 독일어 통역과 번역일을 하고 대학에서 독문학을 강의했습니다. 최근엔 번역서를 출판했습니다.

고향은 소멸위기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옛 고향의 모습이 어땠나요?

그때도 풍기에 돌이 많았습니다. 담은 전부 돌담이었고 한옥도 많았고요. ‘풍기토성’의 흔적이 지금은 찾기 힘든데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남아있었습니다. 토성을 살리고 돌담집들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현시대에 보기 힘든 매우 특이한 모습일 것 같아요. 그걸 유지했더라면 관광객이 많이 오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낙안읍성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는 소식을 들으면 풍기토성과 옛 돌담길이 그립습니다. 지자체 여러 곳에서 옛 읍성을 복원했거나 하는 걸로 압니다.

집집이 있던 돌담이 생각납니다. 풍기의 특징 세 가지, ‘풍기삼다’가 바람, 돌, 아가씨였지요?

바람은 아직도 유명합니다. 돌로 만든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 주인이 거주하지 않는 옛 건물의 돌담이 보이긴 합니다만 드뭅니다. 아가씨는 풍기의 직물산업과 관련 있는데 이젠 자동화 및 시대 변화에 따라 아가씨의 손길과 무관해졌습니다.

옛 추억 중 하나 소개 부탁합니다. 당시 교육 여건이 참 열악했지요?

제가 60년대 초에 금계중학교 다녔는데 학교에서 먼 곳에 사는 친구들이 결석도 하지 않고 출석한 것도 생각납니다. 한 학년 아래에 당시 동급생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명색이 중학생이지만 이미 어른티가 났던 이원덕을 비롯 이성덕, 이용덕 3형제는 예천군 상리면이 집인데 고항치 고갯길을 포함, 멀고 험한 길을 매일 걸어서 학교 다녔습니다. 유상태, 남효근 등은 창락리에서 매일 걸어서 학교에 나왔고 황원상, 정승환 등은 순흥면 태장리에서 매일 걸어서 다녔습니다.

고향에 오시면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송 박사님 연배의 많은 남성은 홀로 식사 준비를 잘하시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함께 웃음).

고향에 와서 좀 오래 있으면 불편하긴 합니다. 저도 식사 준비는 좀 불편한데 4~5일 오래 있으면 밥도 합니다. 반찬은 냉장고 반찬을 먹고요. 옆집에 고모님이 있으니까 고모님이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오라 하시기도 합니다. 김치는 마트에서 사기도 하고요. 고모가 고향집 옆에 사시니 좋습니다.

자제분들은 아버지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할까요?

글쎄요. 예전엔 가끔 풍기에 내려오기도 했는데 요즘은 자기들 직장생활이 바쁜지 풍기에 올 일이 많이 줄었습니다. 어릴 때 이곳에서 만든 추억도 없고...

출향인의 입장에서 고향에 대한 애착심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요?

고향과의 접점이 많이 생기면 자연 고향 생각을 많이 합니다. 고향 소식을 한 번이라도 더 접하면 고향 생각을 더 합니다. 고향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있으면 고향을 더 생각합니다. 고향 사람과의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주시민신문을 읽을 수 있으면 그 또한 애향심이 더 높아지겠지요.

저도 친척들이 여전히 다수 풍기에 계시니 지인이 많지 않은 다른 분들에 비해 더 편해 자주 내려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종합적으로 크게 발전했고 또 발전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고향도 근래에 KTX 열차가 개통되고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는 등 발전하고 있다고 희망적 관점에서 보기도 합니다. 물론 현재에 멈추어선 안 됩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송재호 박사 프로필

- 풍기읍 금계1리 출생

- 금계중학교 졸업

- 서울 경복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어독문학과, 서울대 대학원 독어독문학

- 서독 뮌헨대학교 독문학부, 서울대 대학원 독문학과 박사

- (현)광복회 대의원

- (현)독립유공자 유족회 이사

- (현)번역가, 통역가

- (전)광복회 동대문구 지회장

- (역임)숭실대학교 강의, 동양대학교 근무

- (역서)『녹색의 하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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