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시인)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 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어때요? 이런 편지
발치로 열매 하나가 굴러왔습니다. 자칫 더러운 신발로 밟을 뻔했습니다. 가까스로 주워보니 노란 미소가 수줍게 번지기 시작한 살구였습니다. 엄지로 살살 문지르다가 책상 모서리에 놓아두었습니다. 먼 그리움 하나쯤, 익혀 먹을 심정으로요.
흩어졌던 천 개, 만 개의 바람이 모여 파르르 남은 비를 뿌리네요. 살구 익는 나무 아래서 괜히 시든 이파리나 뜯던 단발머리 여자는, “전장에 버려진” 당신의 피가 6월의 초록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살구처럼 통통 튀던 그 여자는 이제, “잘 걷지 못하는 몸”으로 기울어진 비를 맞고 있습니다. “다시 넝마를 두르고”, 당신이 있었기에 “자꾸 좋아지던 시절”로 걸어 들어갑니다.
먹던 것을 먹고 하던 것을 할 수 있는 오늘이, 얼마나 많은 당신으로 만들어졌는지 6월의 햇살은 알기나 할까요? 6월 어느 한 날만, 둘둘 감아두었던 조기를 내걸어도 당신은 속상하지 않을까요? 슬픔의 한쪽에서 짜글짜글 숨죽여 우는 “파국”이 되리라 작정하지는 않을까요?
당신과 내가 오래 침묵한 6월은 언제쯤 통통거리며 뛰어다니게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