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전부터 귀향 생각, 퇴직 후 귀향 결행...순흥에 정착하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무섬마을 민속마을 지정과 지역 문화재 국비 확보 등 지원
대한제국워싱턴공사관 매입 복원, 남북발굴공동사업 등 결실
문화도 ‘경제’ 페러다임 전환, 인식 확산과 제도화에 노력
‘금선계곡’ , ‘초군청’ 등 가치 높은 유산, 국가유산 등재해야
젊은 시절 공직에 입문해 정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고위공무원이 있다. 김동영 국립고궁박물관장(이하 김 관장)이 바로 그다. 김 관장은 어린 시절 부석사, 희방사, 소수서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가 근무한 곳이 국가유산청(전 문화재청)이니 그의 일생이 국가 유산과 연결돼있다.
귀향 후 돌아온 곳도 세계유산 소수서원 옆 내죽리다. 금성단 옆이기도 하다. 국립고궁박물관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퇴직하기 전 그는 고향에 내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옛 어른들처럼 걷고 버스 타는 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고위공직자 출신임에도 그는 지금 버스와 철도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하고 있다.
김 관장은 영주의 유산으로 국가적 중요성이 있는 자원이면서도 국가 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자원의 가치를 살리고 싶다고 한다. 그는 최근 송준태 전 소수박물관장의 권유로 영주문화연구회에도 가입했다. 순흥향교와 소수서원 참례도 한다.
지난 17일 정부대전청사 대강당에서 개최된,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바뀌는 공식행사에 초청받아 참석했다가 열차를 이용해 돌아온다는 김 관장을 풍기역 앞 카페 ‘기주고을’에서 만났다. 등에 가방을 맨 김 관장은 퇴직자로 보이지 않고 젊은 직장인으로 보였다.
열차로 대전에서 바로 오지 않으니 갈아타셨겠네요. 피곤하시겠습니다. 어떤 행사였나요?
5월 17일부터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공직생활 대부분을 보낸 기관이고 또 퇴직하고 순흥 땅에 살지만, 국가 유산 관련 연구기관에 책임자로 있다 보니 제게도 초청장이 왔습니다. 저도 퇴직하고 못 본 후배들 얼굴도 볼 수 있어 겸사겸사 다녀왔습니다. 문화재란 법률 및 행정 용어도 이제 ‘국가 유산’으로 바뀝니다.
그런가요?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 부탁합니다.
문화재란 용어 대신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유산’(遺産·heritage) 개념을 적용합니다. 사실 문화재란 용어는 일제강점기부터 쓰였습니다. 물질적 성격이 강합니다. 문화재청 중심으로 2005년부터 관련 체계 전반의 개편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드디어 ‘국가유산’ 체계로의 전환이 결정됐고, 2023년 ‘국가유산기본법’이 제정됐습니다.
기존에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사적·천연기념물·명승)·민속문화재로 분류하던 걸 이제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나눕니다. 국보·보물 같은 유형문화재와 민속문화재·사적은 문화유산으로, 천연기념물·명승은 자연유산으로, 전통 공연·예술·기술·생활관습과 민간 신앙 의식 등은 무형유산이라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근무하시면서 특히 기억나는 활동을 몇 가지만 소개하시면?
‘개성만월대 남북발굴공동조사’와 워싱턴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환수에 참여했습니다. 2007년 개성 만월대 발굴에 당시 문화재청 문화재교류과(현 국제협력과) 사무관으로 참여했습니다. 고고학과 서지학 분야 교수님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설명하고 참여하게 했습니다. 이 사업은 대표적 남북 사회문화 교류협력사업입니다.
2007년에 시작,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2018년 말까지 총 8차례 이뤄진 발굴조사로 1만 7천900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었습니다. 담당 사무관으로 또 담당 과장으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 사업은 남북사업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환수도 보람이었습니다. 당초 매입비용 문제로 지체되고 있었는데 2012년 당시 ‘정책총괄과장’으로서 매입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매입을 밀어붙였습니다. 환수 이후에는 국제협력과장으로 고증, 복원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동 공사관은 1889년 2월부터 16년간 대한제국의 대미외교 중심 공간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도 상징성이 높습니다. 지금은 워싱턴을 방문하는 정치인과 저명인사의 필수방문 코스입니다.
문체부 근무 당시 문화와 경제를 별개로 보는 인식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문화도 경제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문체부장관이 경제장관회의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고향 관련으로는 근대문화재과장 재직 시 무섬마을이 민속마을로 지정받았습니다. 영주시 문화재 관련 국비 신청에 차질이 나지 않도록 지원했습니다.
큰일을 하셨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장으로 계실 때 준비하시던 모란꽃으로 본 조선왕실문화였나요? 저도 구경했습니다. 우리 유산의 온라인 접촉 사업도 기억납니다.
모란꽃을 매개로 조선 왕실 문화를 살펴보는 특별전 <안녕安寧, 모란>이 2021년도 7월부터 10월까지 열렸었지요. 모란꽃이 장식된 병풍, 그릇, 가구, 의복 등 각종 생활용품과 의례 용품 유물을 대거 공개했었지요. 그때 모란이 수 놓인 창덕궁 왕실혼례복을 처음 공개했었습니다.
모란 무늬를 왕실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즐겼는지를 보며 자연과 어울리는 우리 문화를 느끼게 했습니다. 모란향이 전시장 안에 퍼지도록 하고 자연의 느낌이 들도록 새소리, 빗소리 등도 나게 했었습니다. 실제 전시 때는 제가 관장직을 퇴임한 시점이었지만 많은 시민이 감상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했습니다.
국민과 유산의 온라인 접점을 높이는 활동은 점점 더 중요합니다. AR(증강현실)을 입힌 덕수궁의 온라인 접근, 인스타그램을 활용한 사업도 했습니다. 유산을 활용한 상품 개발도 시도했습니다. 저는 직원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습니다.
고위공무원으로 퇴직 후 바로 고향으로 귀향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저는 퇴직 후의 귀향 결심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영주는 풍광도 좋고 생활환경도 좋습니다. 또 옛 어른들처럼 생활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가까운 거리는 걷고 먼 거리는 버스를 타려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활합니다. 우리 고향엔 국가 유산이 많고 금선정 계곡처럼 국가 유산의 가치가 있는 유산도 있습니다. 그런 유산들의 보전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영주시에서 운영하는 귀농귀촌 교육도 받았습니다.
쉽지 않은 귀향 결정에 감사합니다. 자녀들은 독립했나요?
현재 단신으로 귀향해 있습니다. 저는 아이가 넷입니다. 2남2녀인데 막내가 군 제대 후 복학해서 대학 4학년입니다. 막내가 내년에 졸업하면 아내도 귀향할 것 같습니다. 아내는 제가 혼자 있는 게 걱정스러운지 가끔 들립니다.
자녀가 넷? 큰 애국입니다(함께 웃음). 부모님도 기뻐하셨겠습니다. 부인은 객지에 나가서 만나셨나요?
아버지는 물론 기뻐하셨지요.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저희는 6남매이고 제가 장남입니다. 당시 연애 결혼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저는 아내와 중매로 만났습니다. 같은 고향인 부석면 상석리 출신입니다. 양가 부모님들이 친구셨습니다. 양가가 3대를 이어 교유한 집안입니다.
당시 연애 결혼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저는 중매였습니다. 어머니가 병약해서 일찍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키 크고 몸집도 있는 상대가 나타나길 바랐는데 아담하고 날씬하더군요. 아버지는 자꾸 만나라 권하시고 동향에다 자꾸 만나니 그다음은 결혼이었습니다(함께 웃음).
이젠 그런 결혼이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함께 웃음).
아내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결혼을 잘한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어도 눈감아 주거든요. 문화가 비슷하다 보니 문화 차이로 인한 오해도 없습니다. 같은 지역 문화권이 좋은 점이 바로 그런 점이라 봅니다.
부친의 영향력이 크군요.
아버지는 가끔 저를 데리고 일하시면서 뒤로는 국망봉이 보이고 앞으로는 멀리 학가산이 보이는 걸 가리키며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퇴직 후 택리지를 읽다 보니 영주 지역은 순흥 땅만 나오더라고요. 당시에 사대부들이 살기 좋은 땅을 기준으로 쓴 것 같습니다. 순흥(順興)이 한자로도 흥하는 곳이니까요.
고등학교까지는 고향에서 수학하셨나요?
제 어릴 때 아버지는 서울에 계셨습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을 졸업하셨고 법학 전공이었습니다. 저는 본가에서 생활했고요. 7살 때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와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중학교 3학년 봄학기에 전학해 부석중학교를 졸업하고 영주중앙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버지가 귀향하셔서 농사를 지으며 부석사와 희방사 관련 일도 하셨습니다. 덩달아 저는 그때부터 옛 우리 유산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영주시 귀농귀촌드림타운에서 귀농귀촌 체험도 하셨지요?
농사는 작은 농토만 가꾸고 있습니다. 비료도 안 주고 풀만 뽑아주는 정도입니다. 풀을 뽑지 않으면 마을 어른들이 잔소리하거든요(함께 웃음). 본격 농사꾼이 못됩니다. 1주일에 한 번 이상 서울에 갑니다. 국가유산 관련 연구기관에 책임(국가유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어서입니다. 평일에는 책을 보고 한문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고향의 국가 유산들이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이라 봅니다. 국가유산으로 아직 지정되지 않은 금선정 계곡은 우리 영주가 자랑할만한 자연유산입니다. 자연유산으로 지정되면 주민들에게 불이익이 간다는 말도 있는데 상당 부분 오해입니다. 그리고 마구령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길은 죽령옛길 같은 자연유산입니다. 순흥의 초군청도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국가 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는 우리 자원입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김동영 관장 프로필
- 부석면 출신
- 서울 북한산초등학교, 부석중학교, 영주중앙고등학교
- 경북전문대 법률과, 한남대학교 사학과, 중국 길림대 대학원 석사
- (현) 국가유산정책연구원 이사장
- (역임)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장, 덕수궁관리소장, 정책총괄과장, 안전 기준과장, 운영지원과장, 국제협력과장, 전통문화교육원 교육운영과장)
- (수상)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