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가 유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 자세를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세대와의 소통, 관대한 자세 보이고,
신세대 또한 포용적인 자세를 취해야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얻은 큰 깨달음
앎에서 더 나아가 실천하고 전파해야
만물이 존재와 형상을 올곧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지반과 뿌리가 필요하다. 또한 주변에 울타리를 만들어 외부의 침해도 막아야 한다. 이것은 결코 식물이나 건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도 탄탄한 땅과 뿌리는 필수 불가결이다. 선대부터 부모까지 이르는 핏줄에서 인간의 줄기와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가문이라는 울타리 안에 삶의 근거를 두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뿌리는 가문이자 가정이다.
사회가 치열해질수록 우리는 경쟁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제 필요한 지식과 기술 습득이 절실하다. 때문에 젊은 세대는 전통을 찾는 것이 현실에 맞지 않는 후진적 사고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태생을 부정하고 피할 수 없다. 자신의 본질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줄기를 따라 뿌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정체성을 명확히 인식해 혼란스러운 현시대에서 자신의 존재와 소속감을 잃지 않고 올곧게 서야 한다.
우리 고장 영주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문구는 ‘선비의 고장’이다. 주자학을 도입해 동방 성리학의 비조가 된 회헌 안향 선생과 백성의 나라를 꿈꾼 민본사상가 삼봉 정도전 선생의 고향이요, 주세붕 선생이 최초의 서원이자 사립대학인 소수서원을 세워 국가적 인재 양성에 힘썼던 곳이기 때문이다.
선비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우리 고장에는 선비정신을 보존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단체들이 많다. 선비의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림 단체도 든든하게 유지되고 있다. 우리의 뿌리를 지키고 전파하려는 이들의 지혜와 슬기가 만들어 낸 단체들이다.
유학이 주는 화평으로 시작한 유림생활
지난 2021년, 우리 고장의 사액서원인 ‘이산서원’이 오랜 기간 끝에 복설됐다. 이산서원 복설 추진에 기여했던 박헌서씨(75)는 이제 이산서원의 별유사로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는 반남박씨 판관공파 종중 도유사로서 가문의 뿌리를 지키고자 맡은 바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도 하다.
그는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영남대학교를 졸업해 현대건설에서 근무했다. 건설 현장에서 많은 회의를 느끼던 그는 33세가 되는 해에 돌연 퇴직하고 귀향했다. 가족이 있는 땅이 주는 푸근함이 그리워서였다. 이곳에서 약 20년간 LG전자 대리점을 운영했고, 농사도 근 8년을 지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농촌 생활을 착실히 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벗을 통해 서원과 향교 문화를 접하게 됐다고 한다. 그것이 약 20년 전 일이다. 유학이 주는 화평을 깨닫게 된 후 무섭도록 선조의 가르침에 젖어 들었고 2006년이 되는 해에 영주향교에서 장의를 6년 동안 맡게 되면서 유림생활에 기초를 닦았다.
진중하게 유학을 배우고 유림생활을 하며 여러 향사에 참여하고 보직도 맡았다. 그는 현재 선비의 후손들이 모여 반듯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국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박약회 영주지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유학에 정진하는 것은 핏줄이 내려준 소임이라고 생각한다”며 “당시 그 친구와 함께 향교에 들어선 것은 불가피한 운명이라 생각하기에 그때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반드시 접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친은 인견과 기와공장을 운영했는데 1961년 발생한 영주 대수해로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이듬해 석재 공장을 운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지금이야 석재가 다방면으로 쓰이지만 당시만 해도 석재가 쓰이는 곳은 묘전석이 전부였다. 그는 “우리 고장과 그 일대에 유향이 많아 사업은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며 “아버지가 산업에 일찍이 눈이 뜨인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큰형이 아버지의 공장을 물려받았고 부친은 또다시 강릉으로 거주지를 옮겨 또 다른 석재 공장을 차렸다. 강릉도 영주와 비슷한 환경이라 그곳에서도 공장은 성황이었다.
묘전석을 주로 제작했던 만큼 부친과 큰형은 조상과 유림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을 보였고 이는 그의 뒤늦은 유림생활에 확신과 책임감으로 굳어지게 했다. 부친이 생전에 가문의 역사를 읽는 즐거움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감사함을 표하기도 했다.
부친 또한 향교에 출입하며 유학을 즐겼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나의 뿌리가 유학과 조상에 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 자세를 배우지 않을 수 있겠냐”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세대 간의 소통으로 선비정신 지켜야
그는 서원과 향교에 몸을 담고 있는 만큼 유림사회가 우리나라의 현재 교육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도 명확했다. 우리나라 말에서 차지하는 한자어의 비중은 일상어 33%, 전문어 59% 정도로 비중이 크지만, 사회적 흐름에 따라 한자의 중요성은 자꾸만 낮아지고 있는 실정을 언급하며 비효율적으로 길어지는 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덧붙여 인간의 사유 깊이가 얕아질 것을 우려하면서 기초적인 한자만이라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엔 모호한 표현으로 쌓이는 오해와 직관적인 표현에 익숙해 사고회로를 멈추는 젊은 세대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
현재 유림사회에서는 한자 교육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기존 천자문을 축약한 400자문 교육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것이 명확히 맞고 틀림을 판가름하기엔 섣부르지만 젊은 세대가 갖는 옛것에 대한 배타적 사상에 대해 조금은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레 주장했다. 옛것은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선비라는 존재가 갓을 쓰고 도포를 두른 사람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며 선비의 기반이 되는 ‘선비정신’에 무게를 실을 것을 강조했다. 이에 더해 기성세대가 신세대와의 소통에 관대한 자세를 보이고, 신세대 또한 편견을 버리는 포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소통을 위해 영주향교에서 각종 사업을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문화재청이 공모한 ‘향교․서원 문화유산 활용사업’을 통해 지역 유림의 문화유산 가치를 현 사회의 자원과 결합해 지역민들의 문화향유 기회를 늘리는 것에 앞장서고 있고, 청소년 인성교육, 전통문화 예절교육, 문화관광프로그램 운영, 문화재 활용사업, 명륜교실 등을 통해 교화(敎化) 사업 또한 활발히 추진해 나가고 있다.
박 도유사는 “지역 유림에서 시민과 가까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며 “현세대가 선비정신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더불어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의예지는 실천을 통해 얻게 된다
선대의 가르침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는 그는 뿌리의 중요성을 가정에서도 느끼고 있다. 그가 부친의 영향을 받아 현재 유학에 정진하는 삶에 감사함을 느끼는 만큼 인생에 있어 또 다른 감사는 자녀라고 말했다. 그는 슬하에 둔 3남매가 모두 바른 심성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다며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판단과 행위는 본인의 몫이지만 긍정적인 행동과 평판의 기제는 예의와 성실에 있다는 자신의 소신을 자녀들에게 늘 말해주고 있고, 자녀들 또한 그의 가르침에 감사함을 표하고 있어 인생의 절반은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약 20년 전부터는 그와 형제들의 자녀들이 매년 70명 가량 함께 모여 정을 나누고 있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도 덧붙였다. 이 가족모임은 매일신문에도 소개된 바 있다.
박 도유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전남 강진에 유배 당시 생활했던 다산초당에 방문해 큰 감명을 얻고 유학을 어떤 방향으로 정진해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다산초당 인근에는 다산박물관이 있다.
다산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박물관으로 이곳에는 다산의 동상과 함께 다산이 남긴 명언을 새긴 비석이 숲으로 조성돼 있다. 이 비석은 일반인은 물론 유명인과 전직 대통령의 글씨로 새겨져 있는데, 박 도유사가 큰 감명을 받은 글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글씨로 새겨진 ‘인의예지라는 이름은 실천을 통해 얻게 되며 결코 마음 속 이치가 아니다’라는 다산의 명언 중 하나이다.
세상 모든 이치와 깨달음이 그렇듯 알기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뜻을 이루고 세상을 이끌 수는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유학을 실천하고 또 전파하며 전통과 뿌리의 중요성을 굳건하게 지켜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그는 앞으로도 현재 몸 담고 있는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열과 성을 다해 진심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은 생은 아내와 정답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도 덧붙이기도 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태어나 맞이하는 최초의 사회는 가족일 것이다. 존재의 근원이자 삶의 뿌리인 선조와 그들의 가르침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사회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어디이고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흔들리지 않고 서서 시대를 맞이하고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어디인가. 선비들이 유학을 배우고 가르쳤던 유교의 철학을 담은 도시, 바로 영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