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귀향길 재현 행사가 지난 12일 서울 경복궁 사정전 일원에서 시작해 25일 도산서원 상덕사에서 고유제를 지내는 것으로 13박 14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영주지역에서는 12일 차인 23일에 죽령을 넘어 옛 풍기 관아에서 남원천을 따라 서천교를 지나 옛 영주 관아(현 영주초등학교)에 도착한 귀향길 90여 명의 참여자들이 영주시민 100여 명과 합세해 이산서원까지 걸어가는 재현행사를 했다.

우리고장 영주는 퇴계 이황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황이 말년에 풍기 군수로 부임했을 때 소수서원을 사액서원으로 지정했으며, 이산서원을 건립할 때는 서원의 이름과 건물의 명칭 그리고 운영규칙인 원규(院規)를 지었다. 이 이산서원 원규는 우리나라 서원의 원규의 시초가 됐다.

또한 이산서원은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판각했으며, 최초로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기도 하며 인근에 퇴계 선생의 첫 번째 부인인 허씨 부인의 묘소도 있다.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학공원에 있는 제민루(濟民樓)는 퇴계 이황, 이황의 아들, 손자가 강학하던 곳으로 퇴계 학문의 뿌리이자 영남학파 형성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퇴계는 이와 같은 영주지역을 거쳐 귀향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귀향길 재현행사는 무척 씁쓸했다. 지난 총선에서 수원정에서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후보의 퇴계 이황 폄훼 사건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지난 2022년 2월에 김준혁 후보가 쓴 『김준혁 교수가 들려주는 변방의 역사』의 2권에서 전승된 설화를 근거로 퇴계 이황 선생이 성관계 방면의 지존이었다는 이야기가 난데없이 언론에 흘러나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도 아니고 단지 항간에 떠돌던 소문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 결국 김 당선자는 성균관에 가서 사과했고 또 안동 유림 대표들을 찾아가 퇴계 이황 폄훼 논란이 되는 책을 모두 회수해 폐간하겠다고 사죄했다.

이 사태는 우리나라의 막장 정치 풍토가 빚어낸 악랄한 정치 공작의 일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영남지역을 꼭 집어서 퇴계 선생의 인격과 삶을 폄훼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와 성관계를 가졌다느니 등 얼토당토 않은 말을 내뱉으면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지역감정을 부추긴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우리는 이와 같은 저열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정치인이 정당화되고 버젓이 국회의원이 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서글프다.

퇴계 선생은 이런 저열한 정치판을 멀리했다. 마지막 귀향길에 오르기 전에 목숨을 내놓고 치열하게 싸움을 일삼는 정치판에서 벼슬길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학문적 성취와 제자 양성을 위해 67세가 되던 해에(1569년) 어린 선조에게 귀향할 수 있도록 간청한 것이다. 그리고 퇴계는 68세 되던 해에 노학자가 어린 왕을 위해 평생 축적된 학문을 여섯 항목에 담아 풀어낸 제왕의 길이나 다름없는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또 선조가 도산(陶山)으로 귀향하여 은거하고 있는 퇴계를 불렀을 때 몸이 병들어 상경하지 못한다고 아뢰고, 그 대신에 자신이 평생 연구한 성리학의 요체를 열 가지로 그린 성학십도(聖學十圖, 일종의 성리학적 제왕학)를 바치기도 했다.

그런데 퇴계는 우리나라의 추악한 정치 풍토에서 느닷없이 날아온 유탄을 맞고 영주지역을 지나치는데, 영주지역에서는 퇴계를 음해한 정치인을 규탄하는 그 흔한 현수막조차 없고, 오히려 5월 4일부터 선비가 신바람이 나서 화려하게 외출한다는 현수막만 즐비하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영주지역의 선비인 안향 선생과 정도전, 그리고 퇴계 선생 이 세분을 묶어서 가칭 ‘선비 순례의 길’을 조성해 전국적으로 선비정신을 알리는 것도 만시지탄(晩時之歎) 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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