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는 우리고장을 지키기 위한 큰 뿌리’

향토사가 주는 작은 영향력 믿어

우리 삶 또한 곧 역사임을 기억하자

기억은 휘발성이 강하다. 때문에 쉽게 과장되고 쉽게 왜곡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록은 중요하다. 우리가 가볍게 쓰는 일기에도 숨김과 거짓이 가득하다. 그러니 모두가 알아야 할 사실을 기록하는 일은 그 무게가 얼마나 중할까.

백암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에서 “역사는 신(神), 나라는 형(形)”이라 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탓이다.

모든 나라가 그렇듯 우리나라도 세월이 흐르며 많은 지역이 통폐합됐다. 우리 고장 영주 또한 영천, 순흥, 풍기 3개의 군이 1914년에 통합돼 지금의 영주가 됐으나 이 사실을 아는 지역민은 많지 않다. 작은 도시일수록 소외되기 십상이니 우리 고장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우리 지역의 정신, 즉 역사를 올곧이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고장 영주에는 지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을 하는 향토사학자가 있다. 바로 풍기 역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김인순(76) 작가이다.

고향에서의 공직생활이 심어준 애향심

김 작가는 풍기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내고 풍기읍사무소에서 근무하다 명예퇴직을 한 풍기 토박이다. 2001년 12월까지 33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마친 후 지금까지 영주 향토문화 연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공직 생활 동안 굳건하게 자리 잡은 애향심이 그의 수많은 연구와 저서를 있게 했다.

그는 공직에 근무하면서 풍기와 관련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교수와 학생을 많이 만났고, 그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또한, 재직하면서 ‘풍기읍소식지’를 집필해 문화 영역의 폭넓은 자질을 보였다. 김 작가는 이런 공직 경험이 자신의 재능과 흥미를 일깨워 줬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1996년이 되는 해, 대한광복단기념비 건립 추진위원으로 참여해 공로패를 수상하기도 했고, 실향민 2세대로서 평화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으로 실향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망향탑은 어제의 일 평화통일비를 세우자’라는 제목의 글을 지역잡지인 ‘소백춘추’에 게재하는 등 실향민을 설득해 대한광복단기념공원 내 평화통일기원탑을 제막하는 데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를 기록하고 기념하는 것에 진심이었다.

뿐만 아니라 퇴임 즈음에는 ‘지역산업을 알고 미래를 열자’라는 제목으로 우리 고장의 주요 산업인 인삼과 사과, 인견 등을 소개하는 글을 엮어 출판기념회를 가지며 가슴 뭉클한 향토 사랑을 보여줬다. 그의 고향 사랑은 계속됐다. 2002년부터 풍기진생영농조합 이사로 재직하며 풍기인삼의 전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당시 지역특성화사업(단장 고승태 교수)의 일환으로 풍기인삼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풍기인삼 천오백년’이라는 제목으로 편찬해 풍기인삼의 제2전성기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런 풍기에 대한 애정은 2004년에 풍기읍발전협의회장으로 일하며 다채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당시 회장으로 재임하며 김 작가는 풍기초등학교와 풍기인삼협동조합이 100주년이 되는 시대적 중요성과 특수성을 인식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무려 2천 점이 넘는 사진과 문서, 신문 등을 수집했다. 마침내 2008년, ‘풍기초등학교 100년사’와 ‘풍기인삼협동조합 100년사’를 편찬, 역사를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뜻이 있는 곳에서 역사의 길을 발견하다

김 작가는 역사를 발굴하고 연구하면서 또 하나 관심을 둔 분야가 있었는데, ‘풍기초등학교 100년사’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로 교육이었다. 2007년, 풍기초등학교를 설립한 구당 이풍환 선생님의 행적을 소개한 ‘근대화의 선구자 구당 이풍환 선생’을 편찬해 한국의 근대화 과정 속 교육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생산했다.

풍기초등학교는 본래 1908년 설립된 사립안정학교로,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하며 시작한 풍기 역사 수집 과정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라고 김 작가는 밝혔다. 그 책을 집필하기 위해 그는 5년 정도 자료조사에 매진했는데, 한국전쟁으로 풍기초 졸업생 명단이 없어져 그 시기 풍기초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졸업생을 찾았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더라고요” 김 작가가 자부심을 품고 사진 2장을 내놓으며 한 말이다. 영주에 사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찍은 최초의 사진인 1911년 영천군청사와 군수가 찍힌 사진, 그리고 사립안정학교 졸업장이었다. 풍기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은 세계 최고 산삼 연구가라 불리는 고려인삼연구소(현 한국인삼공사) 전 소장 한영채 박사의 아버지였다.

안정학교로 기록돼 있어 풍기 소재인 줄 몰랐으나 당시 학교 주소와 현재 풍기초 주소를 대조해 보니 일치했고, 그 과정에서 학교 이름이 바뀐 것을 알게 됐다. 김 작가는 이런 역사 발굴과 모든 기록이 작은 영향력으로 피어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향토사 발굴 자료 '풍기초 졸업증서'
향토사 발굴 자료 '풍기초 졸업증서'
향토사 자료수집 현장 사진
향토사 자료수집 현장 사진

기록되지 않으면 사실로 남지 않는다

수많은 역사를 엮어내고 책을 발간한 김 작가가 유독 애착이 가는 책은 ‘일제강점기 영주’라고 했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 고장은 1914년 3개의 군이 통합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는데, 지난 2014년 김 작가는 영주 시대 출발점 100주년을 맞이해 당시 시대상인 일제강점기의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그때의 발자취를 찾아 정리해 새로운 전기를 꾀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자료를 엮으며 당시 영주 역사에 누락됐던 일제강점기 영주 군수 11명을 찾아내는 쾌거를 이뤘다. 이것이 애착의 근원이라고 김 작가는 말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 설립돼 2009년까지 활동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조사·연구·결정 등을 수록해 2009년 발간한 보고서를 모조리 파헤쳤다. 오로지 영주 군수들의 이름 석 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태껏 해왔던 어떤 역사 발굴 작업보다 힘들었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군수의 이름만 찾는다고 해서 역사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군수로 재임했다는 것은 친일 행위로 인식되니 그들의 후손은 자료를 공개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김 작가는 역사 기록의 중요성으로 그들을 설득했다. 후손들은 그의 뜨거운 열정과 책임감에 마음이 움직여 당시 기록에 보탬이 되는 것은 물론 조상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김 작가는 그들의 도움과 용기에 깊은 감사를 전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역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들고 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고 자존심 따위도 모두 내팽개친 채 우리 지역의 흔적이라면 끝까지 파고든다. 이제 김 작가는 영주의 모든 시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엮어내고자 또 한 번 움직이고 있다. 2021년, 1차 작업으로 ‘풍기군지’가 편찬됐고, 머지않아 ‘영천군지’라는 제목으로 영주의 시간이 편찬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제 원동력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고향 영주를 사랑하고 지역 전통을 올바르게 이어가기 위해 헌신하는 것은 기성세대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인순 작가를 보며 로마시대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철학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떠올랐다. 키케로는 “역사의 기록은 미래를 위한 최고의 가르침”이라며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오로지 향토 사랑과 발전을 위해 소명을 가지고 향토 위에 살며 향토를 기록하며 순수한 역사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그의 뜻과 일맥상통한다. 바르고 모범적인 주인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의 노고로 쓰인 책을 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마음을 넘어선 주체적 삶에 대한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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