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획원 사무관에서 관리관이 되기까지 한국경제개발에 몰두하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 된 한국 경험 살려 개도국 지원

20대 초에 대가족의 가장으로 큰 산이던 어머니 생각 나

국제적으로 귀한 힐링 및 관광자원의 조건, 함께 가꿔야

개도국 요인들 대상 강의
개도국 요인들 대상 강의

6.25전쟁 후 폐허 속에 20대 초반 홀로 되어 대식구의 가장으로 고생하신 어머니 밑에서 자라 가난한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관료로 30년 이상을, 개도국 발전을 위해 20년 가까이 매진한 애향인이 있다. (사)한국개발전략연구소(KDS) 전승훈 이사장이 바로 그다.

전 이사장은 가난한 세상을 바꾸는 길을 가려 농대에 진학했다. 정부주도 경제개발계획 시기에 경제기획원에 투신해 국가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 뒤 어릴 때의 가난한 모습을 회상케 하는 개도국에 머리를 돌려 그들 나라를 돕는 길을 모색하고 지금 그 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가장 가난했던 나라,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며 “기존 선진국은 후진국의 처지를 이해 못해 제대로 지원하기 힘들지만 우리나라는 빈곤을 극복하고 발전한 생생한 경험이 있어 개도국에 최고의 멘토”라고 말했다.

이사장님 고향 친구로부터 이사장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고향에 계실 때 학창 생활이라든지, 친구 이야기라든지 에피소드 같은 게 있으면 소개해 주시지요.

그 친구는 풍기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초등학교 입학하니 교실 부족으로 바깥에서 그늘을 찾아 공부하기도 했지요. 당시 교사들은 매우 엄했습니다. 5학년 때 송강 정철의 시조를 외우는데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나 기르시니’ 구절 관련 질문을 했더랬지요. “어머니가 낳았는데 왜 아버지가 낳았다고 하십니까?” 그랬다가 혼난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편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당시의 교육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초등 4학년이던 후배 아들이 하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선생님이 잘 모르길래 ‘You are stupid’라 했더니 그 교사가 그 아이 어깨를 두드리며 ‘Yes, You are right’라 했다더군요. 당시의 교육 선후진국 차이라고 할까.

형제분들은 몇 분이었나요? 고향을 지키는 분도 계시고요?

제가 네 살 때 6.25동란을 서울에서 맞았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해방 후 우리 국민이 깨어야 한다고 생각, 농산어촌문화협회란 출판 연구기관을 만들어 계몽용 저술을 하시고 월간지 화랑을 발간하셨는데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자 함께 일하던 직원이 노동당 완장을 차고 설쳐 피해 계셨어요. 북한군이 철수할 때 많은 지식인을 끌고 갔는데 아버지도 그때 그 직원의 밀고로 납북되었어요.

74년이 지난 오늘까지 생사를 모릅니다. 북한은 납북자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근래까지 우리 정부는 그 사실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지요. 어머니가 20대 초에 시모, 시동생 및 시누이 그리고 어린 두 아들의 가장이 되었지요. 이들이 대부분 고향에 살아 친척들이 고향에 많습니다. 저는 두 살 터울의 남동생만 있습니다.

그 동생은 고향에 계시고요? 이사장님, 자녀분은 어떻게 되나요?

동생은 풍기에서 학교도 쭉 나와서 어머니 봉양하며 살다 1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은 아들 둘을 두었습니다. 저는 남매를 두었습니다. 둘 다 결혼했고요. 아들은 외국계 컨설팅펌에 근무하다 외국인들 돈 벌어주기보다 개도국 돕는 아버지 일을 함께하는 게 가치 있다며 저와 함께 일합니다. 딸은 중국 상해에서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합니다. 친·외손 포함해 손자 넷이 있습니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경제기획원 근무를 택하셨는데 동기가 무엇인지요?

제가 서울대 농대 농경제학과를 선택한 것도 당시 어린 마음에 농촌의 가난을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한 것이거든요. 그렇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졸업 후 농촌에 뛰어들어 무얼 할지 고민이었어요.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 드라이브를 걸며 행정고시 문호를 활짝 열었지요. 일단 그 일이 보람 있겠다 싶어 지원해 30년 가까이 경제개발정책에 참여했지요.

국제개발컨설팅협회 총회(2023.3.24)
국제개발컨설팅협회 총회(2023.3.24)

개도국 발전 일에 매진하고 계시는데 계기가 있는지요?

원조를 받기만 하던 한국이 원조를 주게 되면서 원조기관 ‘코이카’를 설립했습니다. 그때 일시 파견 근무를 했습니다. 아프리카, 동남아 등을 방문하며 제가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 어릴 때의 가난을 보았어요. 제 어릴 때의 가난을 이야기하고 전쟁으로 저처럼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가난했고 평생 가난하게 살아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난했던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으니 자신들도 잘만 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냐며 눈물을 보이는 거예요. 이들을 돕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한 나라의 공무원으로서 나라를 발전시키는 일에 참여한 경험이 이 일의 사명을 주기 위한 과정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지요. 우리도 외국 원조를 받았잖아요.

사명감을 갖고 시작하셨군요. 처음엔 힘드셨겠습니다.

가난했던 우리가 원조를 받으며 발전한 생생한 경험이 있으니 개도국에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개발 전략을 바탕으로 개도국에 정책을 자문하자는 취지로 공직을 나온 뒤 바로 한국개발전략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20여 년 전 여직원 하나 데리고 출발했지요. 실적이 없으니 아주 작은 연수사업부터 출발했는데 예상 밖의 큰 호응을 받았어요.

당시 몽골 엥흐바야르 대통령께서 한국 국빈 방문했을 때 저에게 몽골 발전 전략을 보고해 달라길래 그분의 숙소인 소공동 롯데호텔로 찾아뵙고 한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몽골의 발전 전략에 대해서 보고했지요. 몽골 대통령이 그 보고서를 몽골 국회에 문서로 보고하라 하더군요. 많은 나라로부터 유사한 요청을 받았습니다. 한국 경제발전의 기적을 학습하고 싶어서였겠지요.

개도국 발전을 위해 매진하셔서 여러 프로젝트를 하셨습니다. 답답한 점도 있을 것이고...

(사)한국개발전략연구소 홈페이지(www.kds.re.kr)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개도국의 발전 관련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타나는 성과에 감사하단 말을 들어 기쁘고, 자부심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도 있지요. 제가 보고한 발전 전략대로 시행하겠단 기자회견까지 했으나 시행되지 않은 나라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결정하면 시행하는데 거긴 여건이 달라서인지 시행이 안 됐습니다. 리비아 카다피 정권일 때와 카다피 몰락 이후 내전 상태에서 총알이 호텔에도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다녀오곤 했습니다. 저와 관계했던 지도층에서 제발 리비아에 와서 도와주면 좋겠는데 내전이 끝나지 않아 안타깝다는 그런 상황도 있지요.

개도국 개발계획 수립과 같은 일은 자금 소요가 많아 힘들 것 같습니다만...

이러한 일들은 저희 자금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한국 원조기관, 세계은행, 아프리카개발은행 등의 원조 프로젝트에 입찰해서 그 자금으로 사업을 수행합니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다

개도국 개발 기여로 훈장을 받으셨습니다. 여러 훈장 중 품격 높은 훈장으로 압니다.

예.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습니다. 5개 품격 훈장 중 둘째라더군요.

하시는 일이 개도국 경제개발 분야인데 활성화 관련해서 정부요청도 받으셨다구요?

(사)한국개발전략연구소는 제가 만들어 시작했고요. 정부에서 제가 하는 이런 일을 좀 더 활성화해서 ‘많은 기업이나 사람들이 해외를 돕는 일이 적합하고 이 일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할 수 있도록’ 기구를 만들자 해서 관련 일을 하는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지난해 5월 ‘국제개발컨설팅협회’가 국무조정실의 인가를 받아 발족했고 제가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고향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어머니께서 굉장히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말할 수 없을 정도죠. 20대 초반에 가장이 되어 시모 모시고 다섯 시동생과 시누이 그리고 어린 두 아들을 부양해야 했지요. 당시 전쟁 후인지라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어린 제게 어머닌 큰 산으로 늘 강건하고, 큰 결정을 하고,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는 분이셨어요. 저는 서울에서 그냥 바쁘게 지냈고... 나이가 들며 어느 순간에 약해지시는 게 실감 나지 않았어요. 돌아가시고 나니 자식 도리를 충분히 못한 게 제겐 큰 한이지요.

어머니가 평소에 강조하신 것이 무엇인지요?

시골에 가면 어머니 방에서 같이 잤거든요. 어머니는 늘 일찍 일어나셔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자식들이 잘 되라는 기도는 맨 뒤였습니다. 기도 앞부분엔 전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들 건강과 잘 전도하길 바라셨고, 나라와 교회를 위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탈북 청소년을 위한 일을 하는 미국 선교사에 오랫동안 헌금하셨습니다. 제가 이어받아 헌금했고요. 그런데경제기획원 과장 시절에 과음으로 인한 수술을 받았습니다. 회복실에서 꿈결에 도란도란 소리가 들렸어요. “하나님, 이 아들을 데려가야 한다면, 대신 저를 데려가 주세요.”란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아들 수술 소식 듣고 밤차로 상경해 병상을 지키던 어머니였습니다.

지금 지방 소멸 시대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향에 자주 오시면서 여러 생각도 하셨으리라 봅니다.

고향에 갈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인구가 계속 줍니다. 제가 다닌 풍기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대폭 줄었고 창락초등학교는 없어지고 풍기북부초등학교는 전교생이 몇 명 되지 않고...출산율 저하, 인구 절벽, 수도권과 농촌 지역 간의 불균형... 국가 차윈에서 특단의 대책이 나와야 합니다. 임기응변식은 안 됩니다. 젊은 세대가 가정을 만들고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정부 정책이 집중돼야 합니다.

우리 고향은 오랜 역사와 문화, 청정한 소백산이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귀한 힐링 및 관광자원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함께 가꾸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전승훈 이사장 프로필

- 풍기초등학교

- 안동사범학교 병설중학교, 경북고등학교

- 서울대 농대 농업경제학(학사)

- 미국 The University of Michigan 경제학석사와 경제학박사

- 일본 中央大學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 一橋大學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 <현재> (사)한국개발전략연구소 이사장 (사)국제개발컨설팅협회 회장

- <역임>

행정고시 13회로 경제기획원 근무(사무관, 서기관, 부이사관), 조달청(비축 계획관, 부산조달지청장, 이사관), 재정경제원 이사관, 관리관 (한국국제협력단 이사),한국조세연구원 부원장, 재정분석센터 소장

- <개도국 관련>

국제개발 분야 주요 경력: 개발도상국 대통령께 국가개발전략에 대한 정책 보고

몽골 H. E. Nambaryn Enkhbayar (2007)

가나 H. E. John Kofi Agyekum Kufuor (2008)

르완다 H. E. Paul Kagame (2008)

콩고민주공화국 H. E. Joseph Kabila Kabange (2012)

- 수상 : 국민훈장 모란장, 국무총리 표창, 근정포장(우수공무원)

- <저서 및 논문>

Seung-hun Chun, The Economic Development of South Korea: From Poverty to a Modern Industrial Stage, (2018: Routledge, New York, in English)

전승훈, 『지속적 발전을 위한 경제적 시스템에 관한 연구』

(서울: 한국조세연구원 2003)

이형구.전승훈 편,『한국 조세.재정정책 50년 평가 및 정책 증언』

(서울: 한국조세연구원 2003) 외 다수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