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몽교류진흥협회 임영자 이사장

자그마한/화분 두개 사들고/아줌마가 행복해 한다/비닐봉지 담아 들고/신이 난 발걸음/여기에 놓을까/저기에 놓을까/이리저리 옮겨보는/고민도 행복하다/제자리 잡고/바라보는 눈길/봉오리 꽃 필 즈음이면/얼마나 더 행복할까/천원짜리 화분 두 개/아줌마가 행복하다/ 영주출신의 시인 임영자(55)씨의 ‘작은 행복’이라는 작품이다.

단발머리 나풀대던 학창 시절의 문학소녀는 나이 오십을 넘겨 비로소 시인으로 등단을 했다. 이산면에서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서울로 상경하여 시계 줄 공장 여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임영자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학교로 돌아와 영광여고에 입학시험을 보고, 장학생이 되어 어렵게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 한몽교류진흥협회 임영자 이사장
고학으로 어렵게 간호대학을 졸업한 문학소녀
여고 시절에는 도민체전에서 우승까지 한 정구선수로 글쓰기와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회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팔방미인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거의 고학이나 다름없이 어렵게 학교를 마쳤다. 이후 부산으로 유학을 가 힘들게 간호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76년 독일에 간호사로 가려고 하던 꿈이 깨어진 후 차선으로 택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해외생활과 국제교류, 교육 사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 간호사 일과 건설업에 종사하던 남편을 일을 돕기도 하면서 자신도 건설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 다시 시를 쓰게 되어 등단을 하게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를 갈 때부터 친분이 있어온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직원들과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국제협력단(KOICA)퇴직자들의 제의로 몽골에 대한 교류협력, 문화증진, 교육진흥, NGO활동 등을 지원하는 한몽교류진흥협회(www.komex.or.kr)의 이사장직을 수락하면서 민간외교관으로 봉사자의 길을 걷게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국제교류에 눈떠
그는 “건국 800주년을 맞고 있는 몽골은 현재 국민총생산이 800불 정도로 1970년대의 한국의 경제 환경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이다. 하지만 광활한 영토와 세계 5대 자원 보유국이며, 한민족과 정서적으로나, 가장 가까운 유전자 구조를 가지고 있는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많은 아시아 국가 중에 한 곳이다.”라고 몽골을 소개했다.

“한몽교류진흥협회는 못살던 시대에 우리가 외국으로부터 받던 원조를 개도국에 되갚는다는 의지로 설립된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후원 받은 옷, 생필품, 의료기구 등을 몽골에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국내 기업의 몽골 투자 사업 지원을 협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폐차될 위기에 있는 디젤버스를 몽골로 보내서 ‘씨티버스’로 운영되도록 하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보석이 많은 나라인 관계로 보석가공학원을 작년에 설립하여 기술자를 키우는데도 힘을 보태고 있다. 현재는 농업분야의 지원과 인터넷 단말기 보급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업도 있다.”라고 한다.

아울러 최근에는 “한몽 간의 유력 정치인들과 중소기업 경영인의 상호방문을 주관하고 있으며, 몽고의 지도층 인사들을 초청하여 한국을 알게 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10월경에 준비 중인 ‘몽골의 날’ 행사는 서울에서 대규모로 몽골을 알리고 홍보하는 것은 물론 재한몽골인들을 위한 위안잔치도 계획하고 있다”라고 한다.

또한 “몽골의 인재들을 한국의 대학으로 유치하여 교육을 시키는 일과 일단 한국에 온 학생들이 정상적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유학생들이 몽골로 돌아가서 이곳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고 몽골의 발전에 원동력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것이 후에 한국을 잊지 않고 가장 먼저 교류를 할 수 있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는 단초이다.”라며 교육 장학 사업에 대한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한몽 간의 교육교류를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는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어렵고 공부를 했던 자신의 경험이 교육 사업을 첫째의 사업목표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고학으로 보낸 학창시절 그는 “힘이 들어도 미래의 꿈을 위해 잠도 잘 수 없었고, 피곤 한지도 몰랐다.”고 할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

“제가 너무 어렵게 공부를 하여 자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실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서 그냥 지나갈 수 없을 정도이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평생 함께 할 생각이다.”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몽 간의 문화, 경제교류와 교육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이 되고 싶어
그는 또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간호사로 갔을 때 한국에서 받는 월급보다 5배나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치안이 불안하여 외국인 여자 혼자서는 외출도 힘들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다. 더욱이 46도가 넘은 땡볕 더위와 싸우는 것도 약한 여자로서는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나 동생들 학비를 위하여,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라며 그러한 경험들이 400명이 넘는 몽골의 유학생들을 지원하게 되었고, 2만 명에 가까운 몽골 출신의 산업연수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몽교류는 기본적으로 문화 간의 대화나 교류로 시작이 되기는 했지만, 이 문화 간의 교류는 조그만 강줄기가 큰 강과 만나고 또 다시 큰 강이 바다와 만나듯 거대한 대양에서 서로의 문화와 역사, 전통, 경제 등이 하나로 만나 거대한 힘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한몽 간의 교류가 큰 파도가 되어 아시아를 이어주고 세계를 묶는 에너지가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는 “한몽교류진흥협회의 이사장으로, 시인으로, 여성 사업가로서 늘 마음이든 시간이든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나누는데 인색하지 않은 참 일꾼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싶다.”고 한다. 

임영자 한몽교류진흥협회 이사장 (연락처 011-611-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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