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경 (수필가)
만물의 생장, 3월이 시작되었다. 언 땅에, 골짜기에, 바위틈에, 나뭇가지에, 샛강으로 봄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평온히 내려앉은 햇살 아래 파종이 시작되면 생명체는 앞다퉈 순을 틔워낼 것이다. 가장 튼실한 씨앗을 골라 알맞은 간격으로 씨 뿌리기가 끝나면, 씨앗은 자신의 때를 정확히 알고 발아를 시작한다.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조금만 나가도 생동하는 봄을 느끼기엔 더없이 좋은 요즘이다. 자연을 벗하며 들녘을 거닐다 보면 마치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가 들리는 듯 마음이 경쾌해진다. 내딛는 발걸음에 리듬이 실린 양 보폭도 빨라진다. 산과 강, 숲과 들이 깨어나는 소리다. 봄이 온다는 건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다. 덩달아 손길도 바빠진다. 옷장과 신발장, 싱크대와 수납장, 집안 곳곳에 들어찬 묵은 때를 닦아내며 봄맞이를 한다. 분주한 손길에 더해 가슴 자락에 묵혀둔 불필요한 감정도 동시에 걸러낸다.
봄의 메시지는 언제나 열린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은 밝음과 긍정, 새로움과 희망이다. 우리는 인생을 논할 때 자주 계절에 비유하곤 한다. 특히 감당키 힘든 난제에 봉착하면 한파에 빗대기도 한다.
저항시인 이육사의 절정에서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절정 부분)는 냉혹한 시대의 암담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누구든 삶을 일궈 나가다 보면 뜻하지 않는 일에 맞닥뜨려 좌절하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늘 좋은 계절이 찾아들면 얼마나 좋을까만 전혀 생각지 않은 일에 부딪혀 고통을 겪기도 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절망을 경험하면서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날이 올 거라는 기대로 위안을 얻는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계절을 만난다. 때론 순서 없이 찾아오는 계절로 혼돈이 일기도 한다. 꽃송이 흐드러진 봄을 맞는가 하면 준비도 없이 살에는 혹독한 겨울을 만나기도 한다. 수고한 손길을 위로받는 넉넉한 가을을 맞는가 하면 때 아닌 폭설을 만나기도 한다.
생의 한복판에서 예고 없이 찾아든 계절 앞에 철퍼덕 주저앉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며 힘든 시간을 달래곤 한다. 하지만 어떤 고난도 끝은 있기 마련이다. 고진감래라고, 그 고난 역시 지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봄이 설렘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겨울이 떠날 그 자리에 새봄이 환하게 웃으며 반기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껏 우리는 생을 열심히 일궜음에도 뜻하지 않은 겨울을 만났다. IMF 외환위기를 맞아야 했고, 신종플루와 코로나바이러스와도 죽을힘을 다해 맞서 싸워야 했다. 간혹 노력의 대가는커녕 그동안 쌓은 과업을 포기할 때도 있었고, 심신을 다해 기울인 정성이 수포로 돌아가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경험하지 못한 낯선 세계는 절망과 함께 미래를 불안케 했다. 하지만 포기 또한 쉽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한 삶이 부정당할 수 없었으며 아픔 속에서도 성장은 이뤄지고 있었다.
춥고 더딘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봄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분골쇄신의 힘든 날이었지만 그 겨울도 결국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있어서다. 어떤 계절보다 봄에 대한 기대는 고난과 역경을 견딘 후에 찾아올 최고의 가치라 생각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봄이 오면 그 힘듦에 마침표가 찍히면서 가슴 뛸 새로운 날이 보상하리라 믿었다.
파종한 자리에 머잖아 초록이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씨 뿌린 수고에 대한 보답이다. 물론 뿌리 내리지 못할 씨앗도 있을 테다. 그 빈자리는 건실한 씨앗이 더 크게 자라 영역을 확장해 나갈 것이다. 무슨 일이든 끝은 있기 마련이다. 좋은 일이라고 영원히 좋을 수 없으며, 힘은 일 또한 영원하지만도 않다. 우리가 모진 시간을 견뎌낼 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영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난관에 부딪힌 이들에게 외치고 싶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어도 그 시간은 꼭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봄이 저만치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으니 이 겨울도 곧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일어나 함께 봄을 맞이하자고. 지금도 어려움 속에서 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훈풍이 불어 봄꽃 만발하듯 사방으로 문이 활짝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전한 봄맞이와 함께 힘찬 응원을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