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 시기, 청소년 향한 어른들의 관심, 또 관심 갖는 사회가 돼야”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일반 교회 안정된 담임 목사 그만 두고 특수 청소년 위한 활동 20년 세월

특수 청소년 돌보기 위한 수익원으로 시작한 어린이집, 모범 어린이집 성장

미국 입양 간 막내 여동생 포함, 어린 시절 뿔뿔이 헤어졌던 가족 다시 찾아

입양갔던 막내 여동생을 찾고 온가족이 모여 만든 앨범 표지
입양갔던 막내 여동생을 찾고 온가족이 모여 만든 앨범 표지
감호 위탁소년 상담실 개소식 날(앞줄 왼쪽 첫째가 이용학 목사)
감호 위탁소년 상담실 개소식 날(앞줄 왼쪽 첫째가 이용학 목사)

어린 시절의 간난신고(艱難辛苦 갖은 고초를 겪어 몹시 힘들고 괴로움) 환경을 딛고 일어나 사회적으로 일익을 담당하는 애향인이 많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불우 청소년들을 위해 기도하며 돌보는 애향인이 있다. 편안한 길을 그만두고 힘든 길이지만 거기서 감사와 보람을 찾고 행복해하는 애향인이다. 우리고장 순흥면 출신의 이용학 목사가 바로 그다.

지난 18일 강연을 위해 순흥교회를 방문한 이 목사를 만났다. 이 목사의 어린 시절은 간난신고의 시기였다. 당시의 우리나라 시대상의 일부이기도 했다지만 질풍노도의 나이에 환경을 비관해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었으나 이 목사는 자신의 꿈을 찾고 꿈 실현에 매진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모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그 와중에 오른손을 잃고 방황하다 희망의 길을 찾아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의 일대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어디에서 태어나 성장하셨는지요?

순흥면 석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5남매 중 장남입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아버지를 따라 태백으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알콜 중독에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저희 5남매와 어머니에게 불행의 나날이었습니다. 고향에도 소문이 나 제 나이 14세 때 고모할머니(김호기 순흥면노인회 부회장의 모친)가 태백으로 찾아오셔서 저와 바로 밑 남동생을 순흥면 석교리로 데려가셨습니다. 여동생 둘은 남의 집 수양딸로 흩어졌습니다. 막내는 어머니가 데리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셨습니다.

지난 일이지만 안타깝습니다.

고모할머니 댁에서 살았지만 농사만 짓고 어른들 심부름만 하다 보니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16세 겨울에 참 부끄럽지만 고모할머니 주머니에서 5천원을 갖고 가출했습니다. 서울에는 일할 곳도 많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소리에 무작정 가출해 상경했습니다.

가출 청소년이었군요. 지금은 미성년 노동착취에 해당되는데.. 일을 할 수 있었나요?

당시 성동구 성수동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많았습니다.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숙식 제공에 야간학교도 다닐 수 있어 너무 좋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다 사출기 기계에 오른손이 끼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경희대 병원에서 여러 달 치료와 수술을 받았으나 살이 계속 썩어 들어가 오른손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일도 못하고 학교도 못다니고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질풍노도의 나이 때인데.. 방황 속에 잘못된 길을 가지 않으셨으니 다행입니다.

약 1년 방황하다 정신 차리고 가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막내 여동생을 빼고 모두 찾았습니다. 세 살이던 막내 여동생은 어머니가 더 좋은 세상에 살라고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셨더군요. 막내 여동생은 한참 뒤에 만났습니다. 부모님과 남동생은 영월군 주문리에, 저와 여동생 둘은 서울에 살면서 저는 성수야간학교를 다시 다녔습니다.

고향의 순흥교회 강연 전 기념으로
고향의 순흥교회 강연 전 기념으로

목회 활동을 하신 계기가 무엇인지요?

성수야간학교 졸업 후 부모님이 계신 영월에 가니 교회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오른손 손목 절단에 따른 절망감 속에 원망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부흥회도 남동생이 하도 졸라서 마지못해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가 모두 제게 하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부흥회를 5일간 했는데 새벽, 아침, 낮, 밤 매일 계속 참석했습니다. 불행한 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살게 하리란 소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주문리 교회 담임이셨던 최진순 전도사님이 신학교 가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총신신학원 졸업 후 바로 청소년 특수목회를 하셨는지요?

아닙니다. 30세에 일반교회 담임목사로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물음이 계속 생겼습니다. 10년 만에 담임목사를 그만두고 청소년 특수목회로 나갔습니다. 당시 서울소년원에서 사역을 하시던 김원균 목사께서 갑자기 쓰러져 김 목사님 회복 시까지 제가 소년원을 섬기겠다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소년원 원생들의 이야기를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들, 부모 이혼으로 방치된 아이들, 생계형 절도를 한 아이들, 소년원을 나와도 돌아갈 곳이 없는 아이들… 이들을 돌보아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런 청소년들 돌보려면 돈도 많이 들고... 혹시 사모님의 반대가 없었나요?

외부 후원을 받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지속적인 소득원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경제적 뒷받침을 위해 어린이집을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적극 찬성했습니다. 어린이집을 인수해 운영하며 현재 지역에서 인정받는 어린이집으로 성장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소년원 운영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소년원 학생들의 재범률이 높아 안타까웠습니다. 예방이 중요하단 걸 깨달았습니다. 2004년 수원지방법원 판사님을 찾아갔습니다. 퇴소한 아이들의 재범을 막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판사님께서 위탁보호위원 제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제안에 감사하며 소년위탁보호위원 위촉을 받았습니다.

예방에 중점을 두는 활동으로 초중고에 가서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 상담을 하고 법원으로부터 위탁받은 비행 청소년 케어를 하고 있습니다. 소년원 퇴원 후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과 법원으로부터 위탁받은 청소년들을 20년째 상담하고 돌보고 있습니다.

멋집니다. 법무부에서 목사님의 활동 관련 영상도 만들었다면서요?

2012년 3월 법무부에서 제가 돌보는 청소년들의 생활 현장과 학교생활을 촬영했습니다. 그 영상은 지금도 ‘[청와대]서울소년원방문’ 제목으로 인터넷에서 검색이 됩니다. 그 해 말 이명박 대통령께서 저희 소년원을 방문하셨을 때 그 영상을 함께 관람하고 제가 강사로 나서서 소망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특수 청소년을 위한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점도 있고 보람도 있었겠군요.

어려운 건 기도로 극복합니다. 불우 청소년이 최소한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잠깐의 잘못으로 어긋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걸 예방하는 게 제 기도입니다. 잘 참아주고 따라와 준 청소년들이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 잘 살고 있습니다.

돌봐준 청소년들이 성장해 결혼하고 자녀와 함께 찾아오고, 군 제대 후 취직하고 몇 년 후 불쑥 여자 친구를 데리고 찾아와 감격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저는 그 청소년들에게 작은 것, 극히 작은 걸 하나 도왔을 뿐인데 그들은 마치 전부를 받은 것처럼 말하고 표현할 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순흥교회 앞에서 어릴 때 같이 살았던 김호기 아제와 함께
순흥교회 앞에서 어릴 때 같이 살았던 김호기 아제와 함께
이사장으로 있는 어린이집
이사장으로 있는 어린이집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목사님들도 은퇴가 있잖아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하실 건지요?

저는 이 일을 제 힘 닿는 때까지 하고 싶습니다. 제 사명은 끝까지 청소년 특수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영혼을 위해.

목사님 같은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가장 좋겠지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도 관심, 둘째도 관심입니다. 그냥 못 본 척하는 사회 분위기를 바꾸어야 합니다. 내 아이처럼 내 조카처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전에 법무부 장관을 뵈었을 때 ‘소년원만 잘하면 소용없다. 특수 청소년들이 취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예스센터가 그 후 화성에 생겼습니다. 이중명 회장님이 100억을, 홍라희 여사가 10억을 그리고 여러 분들이 출연을 해서 200억 원의 기금으로 직업훈련센터가 생겼습니다. 직업훈련을 통해 사회에 나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기관이 생긴 게 제겐 큰 보람입니다.

막내 여동생은 가장 늦게 찾으셨다고 하셨는데 언제 찾으셨는지요?

제가 20세 때부터 여동생의 입양 관련 기관을 방문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미국 입양기관에도 여러 차례 편지를 썼습니다. 답변이 없었습니다. 20여 년 찾아도 찾지 못해 포기하려고도 했는데 아내가 나무라며 ‘어머님 살아계실 때 찾아 만나게 해야 한다’고 격려했습니다. 계속 문을 두들겼습니다. 2010년 4월 10일 막내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막내 여동생은 열흘간 금식기도를 하고 미국 입양기관을 방문했더니 직원이 제가 그동안 보낸 편지 꾸러미를 갖다 주더랍니다. 전에 있던 직원이 전하지 않고 모아 두었던 걸 새로 온 직원이 서류정리를 하며 발견했답니다. 여동생 남편도 목사로 아시아 선교본부 사무국장으로 사역 중입니다. 여동생 부부는 중국 쓰촨성에서 10년간 선교활동도 했습니다.

고향 사랑하는 마음도 깊으신데 고향 발전을 위해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안을 하신다면?

출향인이 고향을 많이 방문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아이디어를 만들고 실행했으면 합니다. 도시와 시골이 자매결연하듯이 출향인들과 연결을 하면 좋겠습니다. 고향에서 생산하는 걸 팔아주고… 일회성 행사 보다 꾸준히 연결되는 게 좋겠습니다. 영주시는 가서 볼 곳도 많습니다. 가족들과 놀러 가자는 분위기도 만들고요.

고향의 후배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꿈을 포기하지 말아라’입니다. 요즘 청년들이 대학 졸업 후에도 실업자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데 기회는 또 옵니다. 그 단계가 힘들어서 그렇지 다들 보면 누구나 어려움은 있습니다. 꿈을 포기하지 말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이용학 목사 프로필

- 순흥 석교리 출생

- 순흥초등학교

- 성수야간학교(중고등 과정)

- 총신신학원 졸업

-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총신대학교 경기 동중노회 소속

- (현)청소년 특수목회 2001년~

- (현)법무부 소년보호위원 2001년~

- (현)신나는 예꼬어린이집 이사장 2002년~

- (현)한국교정복지학회 이사 2015년~

- 청와대 이명박대통령 서울소년원 방문 초청강사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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