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복 (소백산백년숲 사회적협동조합 이사)

엄마가 돌아가신지 6년이 되어간다. 내가 병실에 누워 있으니 모든 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온다.

엄마가 담낭염을 앓고 난 후, 우리는 영주에 집을 짓고 아내가 먼저 내려와 살았다. 나는 주말에 내려와 지냈다. 시간이 지나 영주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사무실을 정리하였다. 담낭염을 앓고 난 후 엄마는 혼자 지내시는 것을 두려워 하셨다. 외진 환경이 걱정되었지만 엄마를 영주로 모셔왔다. 엄마는 산골 외딴 집 살이에 잘 적응하셨다.

마당을 잡초 하나 없는 잔디밭으로 가꾸셨고, 텃밭도 잡초하나 없었다. 수십 년간 고질병이었던 천식이 말끔하게 없어졌다. 숨 쉴 때마다 나던 바람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주말이면 도시에서 자식들이 내려오고, 멀리 사는 이종사촌들도 찾아와 엄마는 심심할 틈이 없으셨다.

고향마을에서 이웃에 살던 분들도 찾아와 소식을 전해주시기도 했다. 새삼 엄마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놀랐다. 내내 순탄한 것만도 아니었다. 의욕이 과하신 엄마가 엉덩이 걸음으로 마당이며 밭을 다니시니 약해진 허리뼈가 금이 가 고통을 호소하셨다. 그때마다 안동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셔야 했다.

엄마가 달라지신 걸 눈치 챈 것은 영주 오신지 4년 후 쯤이었다. 요양병원에 보내달라고 조르셔서 입원시켜 드리고 면회 갔더니 “한 달에 한번만 오나라” 하시더니 3주가 되자 “집에 가자!”하셔서 그날로 퇴원하고 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아침 식탁에서 골난 얼굴로 계시다가 찬물에 한술 밥을 말아 드시고 방으로 가셔 며느리가 당황하게 만드셨다. 또 어느 날은 새벽에 욕실에서 자신의 속옷을 빨고 계신 것을 아내가 보고 대신하려 하자 화를 내시며 혼자 하셨다. 아내가 당황해하며 ‘치매오셨나?’ 했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드시고 쉬시던 엄마가 평온한 음성으로 “아범, 들어와 봐라” 하셨다.

뭔가 정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는 표시를 하셨다. 내가 들어가 앉았을 때 엄마는 조용히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막내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해라, 어멈한텐 미안하다” 하셨다. 동생에게 전화해 어머니 뜻을 전하고 망가지는 자신을 며느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신 거 같다고 말 해 주었다. 아내가 많이 서운해 했지만 어머니 마지막 자존심이니 지켜드리자며 달랬다.

그날 오후 동생과 매제가 와서 엄마를 모셔갔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4남매를 키우는 동생이었다. 동생은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요양보호사가 되었다. 주간보호센터에 출근하며 엄마를 모시고 다녔다. 엄마는 언제나 딸이 곁에 있는 것을 든든해 하셨다. 방이 3개뿐인 아파트에 살았는데 큰방을 엄마가 쓰시고 작은방과 거실에서 부부와 조카들이 생활했다. 조카들도 용돈을 아껴 할머니 좋아하시는 걸 사들고 오곤 했다. 어쩌다 내가 뵈러 가면 밖에까지 엄마 웃음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엄마는 행복하게 지내셨다.

동생네서 지낸지 두해가 지났을 무렵 허리통증을 호소하셨다. 나는 예의 골절문제인가 했다. 동생이 병원에 모시고가 골시멘트 시술을 했지만 허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서야 분당 큰 병원으로 옮겼는데, 십이지장궤양이 천공되었고 처치가 늦어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수술을 안 할 수도 없고, 수술 하면 간 기능이 약해 마취에서 깨어나기 어렵다고 했다.

“확률로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을 때 주치의는 “십 중 팔구는 어렵습니다” 하셨다. 그날 밤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상황은 다 아는 것이고 의견을 말해봐” 형님이 입을 열었고 “수술 해!”하고 내가 말하자 동생이 나를 바라보며 “오빠”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엄마 여든 아홉이셔, 보내드리자!” 형님이 정리하시자 아무 말 못하고 깊은 침묵에 잠겼다.

이튿 날 수술시작 직전에 면회시간을 달라고 했다. 강력한 진통제와 각성제를 투여하기로 했다. 사촌들과 고향 이웃들에게 연락해 서운한 사람이 없게 했다. 면회시간이 되자 평온한 표정으로 엄마는 자식, 손주들과 사촌들, 이웃들의 손을 잡으시고 “그동안 고마웠어. 잘살아!”하셨다.

면회를 마치고 수술실로 가는 엄마를 향해 “엄마 빨리 와야 해, 막내가 요기서 기다릴거야!”하며 동생이 다가갔지만 이내 수술실 문이 닫혔다. 모두가 납덩이를 삼킨 것 같았다. 수술이 잘 될 수도 있지만 마취에서 회복되기에는 간 기능이 너무 약하셨다. 엄마는 수술 후 6일을 누워계시다 숨을 거두셨다. 엄마는 중대공원묘역에 누워계신다. 해마다 유월 엄마 기일이 오면 형제들이 모여 엄마를 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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