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유적 보존 ‘앞장’선 이유 “미래세대에 자부심 주고싶어요”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귀농 초기 행복마을 사업 기획 성공적 추진 ‘보람’

서울에서 영주까지 가족이 함께 300km 걷기도

친환경 농업에 가금류도 방목형, 동물복지 실천

기자와 인터뷰하는 김서원 회장(오른쪽)
기자와 인터뷰하는 김서원 회장(오른쪽)

이웃 지자체 단양에서 왕성한 주민자치 활동을 하면서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과 초기철기 시대 유적 보존 활동을 하는 애향인이 있다. 김서원 단양수양개보존회장이 그다.

김 회장의 집은 앞이 탁 트여 남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이다. 마당에서 청둥오리와 평화롭게 어울리는 두 마리 진돗개 중 하나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나 정상처럼 행동하는 모습이었다.

김 회장은 10년 전 귀농해 1만 평의 땅에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있다. 단양군 가곡면에서 주민자치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현재는 고문을 맡고 있는 등 지역발전 활동도 왕성하게 하고 있다. 귀농·귀촌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서울에서 건설 해외수주 업무를 오랫동안 하다가 50대 말에 귀촌한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왜 귀촌하셨나요?

저는 귀촌이 아니고 귀농을 했습니다. 농사를 짓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부인이 반대하시지 않았나요? 많은 경우 부부의 의견 불일치로 귀농귀촌하지 못한다잖아요.

우린 둘 다 시골살이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내도 영주 출신입니다.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정년이 여러 해 남았음에도 같이 단양에 내려왔습니다.

귀농귀촌을 바라는 남성들은 많은데 여성들의 경우 귀촌의 뜻이 있어도 친구도 없는 시골 생활에 선뜻 귀촌을 실행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우리 부부 둘 다 시골 출신이라 귀농귀촌의 거부감이 없었고 고향 영주가 바로 옆인지라 별 문제가 없었기도 합니다. 아내는 현재 새로 많은 친구를 사귀고 저보다 바쁩니다(함께 웃음).

귀농귀촌을 하는 분들은 대부분 시간을 같이 보냅니다. 많은 갈등이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일어나잖아요. 부부싸움도 많을 듯한데..(함께 웃음)

그렇습니다. 사회 갈등도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도시에서 생활영역이 달라 갈등이 적다가 귀촌해서 시간을 같이 보내면 부부갈등도 당연히 많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소한 의견충돌은 많았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서로 다른 일을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요.

멋집니다. 귀농귀촌을 추진하는 분들 대상으로 강의도 하셔야겠는데요?

귀농귀촌하는 분들이 우리 집을 많이 방문합니다. 부부 이야기, 기존 주민들과의 어울림 이야기, 농사 이야기, 시골에서의 사회 활동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영주중 출신 최태현 유튜버를 통해 단양 수양개 보존 활동을 하시는 동기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멸종 위기 개를 복원 보존하는 분인가 했습니다. 진돗개가 아닌 수양개...(함께 웃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양개의 ‘개’는 개울이나 개천의 ‘개’입니다. 수양버들이 많던 개울가에서 선사시대 인류의 유적이 40년 전 발견됐지요. 동아시아 최초로 인류가 살았던 흔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입니다.

단양이 관광 중심 지자체이긴 한데 선사시대 유적은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지라 단양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양개는 단양 적성면 애곡리 일대에 있습니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환경이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기에 맞았나 봅니다. 여기서 발견된 유물유적은 중국 화북지방, 시베리아 남부지방, 일본 열도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유적과 비교되는 연구자료라고 합니다.

구석기시대 유적 근처에서 초기철기시대 집터도 발견됐습니다. 단양 수양개 유적은 동아시아 선사문화의 교류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라 합니다. 지금까지 20여 차례 전 세계 여러 나라 학자들이 수양개 관련 논문을 수백 편 발표했습니다.

주로 하셨던 일은 건설 해외수주 업무이고 전공도 고고학과는 거리가 먼데 어떻게 단양수양개보존회장을 맡으셨는지요?

선사시대 인류의 흔적이 많지 않잖아요. 단양 이주 초기에 선사시대유적 이야기를 듣고 보존 활동에 함께 했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뒤에만 있으려 했는데... 단양수양개보존 활동을 많이 하시고 단양수양개보존회 초대 회장인 정하모 전 단양군수님의 강권으로 제가 회장을 맡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단양 출신도 아니고.. ‘이런 활동은 단양 출신이 맡아야 한다.’고 극구 사양했습니다만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수양개유적의 가치와 문화자원 활용방안 포럼 (2023년6월)
수양개유적의 가치와 문화자원 활용방안 포럼 (2023년6월)

수양개보존회장으로 특히 역점을 두고 있는 점은 무엇인지요?

지자체 차원에서 좀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수양개 선사시대 유적은 국제적으로 더 유명합니다. 수양개 빛터널을 많은 관광객이 찾듯 단양수양개 선사시대 유적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특히, 저는 이 지역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이 지역의 보물에 대해 알고 자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관할 교육지원청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영주에도 순흥을 비롯 옛 고분들이 많이 묻혀 있습니다. 관련 조사도 있었습니다. 단양에 선사시대 유적이 있다니 소백산권역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며 문명을 발전시켰을 수 있겠단 생각도 듭니다.

동감입니다. 제 고향 영주시 문수면에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흩어진 보물들이 있어 가슴 아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옛 방석사(현 문수사) 절터에 자주 들렸습니다. 절터에는 부처상이 수십 개 즐비했습니다.

아주머니들이 그 부처상에 금줄을 치고 자식들의 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그런 유적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문수초등학교에 옮겨진 사천왕상 하나만 남았습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소백산권역 유적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합니다.

그렇군요. 수양개보존회장을 맡으신 데는 그런 아픈 기억도 작용하였을 것 같습니다. 귀농하시면서 힘들지 않으셨나요?

안 하던 일을 하면 힘들 수밖에 없지요. 저는 방치농법을 쓰는지라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그냥 방치하는(함께 웃음). 저는 농약을 별로 치지 않습니다. 풀이 자라면 예초기를 돌립니다만 풀과 함께 작물이 큽니다.

어떤 농사를 지으시는지요? TV에 소개된 적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TV에 나온 농사는 아로니아 농사입니다. 아로니아 재배지가 늘면서 재미는 못 봅니다. 재배를 포기한 농가도 많습니다. 다양한 가공품을 만드는 등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아로니아 말고도 복숭아 등 다른 과수들도 있습니다.

닭, 청둥오리, 거위는 자연상태에서 키웁니다. 제가 300마리 키운다고 우스개를 하는데 300마리 중 200마리는 참새입니다. 참새들이 같이 먹이를 먹습니다(함께 웃음). 조류를 키우면 삵이 문제입니다. 삵이 침입하면 난리 납니다. 삵은 한 마리만 잡아가는 게 아니라 여러 마리를 죽입니다. 매는 한 마리만 잡아가는데..

처음 농사짓기 위해 오셨을 때 어땠는지요? 생경하다든지 기존 주민들이랑 관계도 궁금하고..

선친이 영주시 문수면에서 1만 평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저도 여기 와서 1만 평을 마련했습니다. 그냥 ‘1만 평’만 생각하다 못 쓰는 땅도 샀습니다. 문수의 땅은 농사짓기 좋은데 이곳은 비탈도 많고 돌도 많고.. 사전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저는 농사로 돈 벌려 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물으면 연 농업소득 365만 원이라 합니다. 하루에 1만 원만 벌면 된다는(함께 웃음). 현장 견학으로 저희를 찾는 분들에게도 고소득을 바라는 귀농은 실망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저는 제 농사보다 마을 사업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행복마을 사업을 유치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더 나은 마을을 만드는 활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주민자치위원장도 맡았습니다. 현재는 고문으로 물러나 있습니다(주민자치위원장으로 장학금 기탁도 하고 경로당에 김장김치와 매밀묵을 전달하는 등 주민 복지 활동도 활발했다).

두 아들 내외와 함께(제주도에서)
두 아들 내외와 함께(제주도에서)
이종고종외사촌들과 함께(2023년9월)
이종고종외사촌들과 함께(2023년9월)

문수면 출신이라 하셨는데 중학교는 영주에서 다니셨지요? 공부를 잘 하셨나 봅니다(함께 웃음).

문수초등학교 다닐 때 영주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나온 초중고대학 중 영주중이 최고 명문입니다(함께 웃음). 영주중 출신이면 안동고는 쉽게 입학했거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대학 때부터 어떻게든 집안을 일으키려고 학생운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희대에서 학비 걱정 없는 고시반에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고시반 동기입니다.

대학 졸업 후 건설회사에서 서울과 사우디를 오가면서 해외건설 수주 업무를 했습니다. 1년 중동 생활, 2년 국내 생활의 반복이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은 50대에 끝내고 농촌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60이 다 돼서야 농촌에 돌아왔지요.

고향을 사랑하는 활동도 많이 하셨다 들었습니다. 문수면 향우회 활동, 영주중학교 재경 동창회 활동 등. 예전에 서울에서 문수면 집까지 온 가족이 걸어서 가기도 하셨다구요?

문수면향우회에서 선배들이 뭘 하라고 하면 했지요. 자신이 살던 곳은 늘 사랑의 대상이잖아요. 재경문수면향우회 창립 발기에 참가했습니다.

영주의 향우회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향우회인지라 기쁩니다. 제가 나온 학교 중 가장 명문인 영주중학교 재경동창회 활동도 같은 선상이구요. 20년 전 새해 첫날 새벽, 가족이 함께 서울집을 나서 문수까지 걸었습니다. 300km 거리입니다. 아내와 두 아들과 매일 30km를 걸어 열흘 만에 문수 집에 도착했습니다. 같이 걷는 동안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가족의 의미도 다시 생각했습니다. 가훈은 ‘깨어질지언정 우그러들지 않는다’ 입니다. 귀농하고서는 온 가족이 함께 매년 낚시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무섬마을에서도 두 번이나 했습니다. 해외로 낚시를 가기도 합니다. 제 꿈이 60대에는 농사, 70대에는 고기잡이, 80대에는 음악이었거든요(함께 웃음))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김서원 회장 프로필

- 문수초등학교, 영주중학교

- 안동고,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 (전)공영토건

- (전)동아건설

- (전)단양군 가곡면 주민자치위원장 (현 고문)

- (현)단양수양개보존회장

- (현)더채움협동조합 이사장

- (현)단양수생태해설사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