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신의의 원칙(이하 신의칙) 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 있어 상대의 신뢰에 반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우리의 민법 제 2조는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부연하면 사회적 관계에 있어 특히 개인의 법적인 권리를 다룰 때 전제 내지는 공리가 되는 틀에 해당한다.
신의칙(信義則)의 중요성은 다음처럼 가정을 해보면 알기가 쉽다. 만일 일상에서 신의칙이 작동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야말로 아무것도 온전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믿음을 토대로 하는 종교는 사라질 것이고, 약속이나 선서, 거래 관련 문서는 한낮 헛된 쪽지가 될 것이다. 즉, 모든 계약적 형태의 행위들은 무엇 하나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시장까지 나서서 절대 허가하지 않겠다던 풍기읍 백1리 돈사가 지난 13일 가축 사육사업 지위 승계서가 발부되었다. 9월 21일자 본지의 1면 기사의 내용이다. 지위 승계란 다른 사람의 권리나 의무를 물려받는다는 의미다. 이번 사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백1리 돈사는 600여 두의 돼지를 키우던 A씨가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축산폐수를 무단 방류하여 폐기물 관리법에 따라 벌금 300만원의 행정처분을 받았다. 또한 아무런 신고도 없이 30일 이상의 무단 휴업의 이력도 있다. 이후 A씨는 사업장을 B씨(현 소유자)에게 양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인근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한 바 있다. (주민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는 당시 주민들에게 물의를 야기한 돈사의 폐업을 약속했다고 한다.
앞에서 신의칙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은 까닭이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시가 통지한 지위승계서는 사실상 가축 사육 허가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3여년전 주민들에게 했던 시의 약속이 공염불이 되는 순간이다. 이번 지위승계는 명백히 신의칙에 어긋나는 일종의 자해 행위와 비슷하다. 당연히 주민들은 이의를 제기했고, 그러나 시 측은 속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시장은 주민들의 면담을 피하고 있고, 관련 공무원도 매매행위에 대한 지위 승계가 법적으로 불가피했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있다. 한 손으론 폐업을 약속하고 다른 한 손으로 이를 번복한 시의 행태에 대해 주민들만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일각에서는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소송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적 물적 비용은 해당 주민들의 부담이다.
자기책임의 원칙이라는 게 있다. 사인(私人)은 물론이고 하물며 공신력을 핵심 자산으로 삼는 지자체야 두 말 할 것도 없다. 시민의 신뢰를 저버린 이번 돈사 사태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엎질러진 물을 쓸어 담을 수 없다면 시비라도 가려야한다. 그리고 만일 시의 잘못이 있다면 관계자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에 신의칙이 살아있음을 뒤늦었지만 영주시가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