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

 

느티

                       - 김영주

 

첫 아이 낳던 그날 보호자 서명란에

또박또박 눌러쓴 당신의 이름 석 자

든든한 느티나무처럼 그 그늘 아늑했다

 

아이들 키우면서 부모로 익어가며

큰아들 작은아들 보호자로 사는 일도

마땅히 누려야 하는 특권으로 알았다

 

살면서 아웅다웅 너 먼저 가, 나 먼저 가

지지고 볶던 일이 왜 이리 서러울까

넘치는 분복인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꿈에도 이런 날은 오지 않길 바랐지만

태어나면 늙는 걸, 늙으면 병드는 걸

숙제를 다 마쳐야만 비로소 안식인 걸

 

호흡기만 저 혼자 쌔액쌕 숨을 쉰다

이, 저승 경계에서 얼마나 외로울까

그 고통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차마 없다

 

감당 못 할 무거움이 사치처럼 밀려온다

살아줘 고맙단 말 혼몽에라도 듣는지…

오늘은 보호자란에 내 이름을 적는다

 

-한 그루 느티나무(당신) 덕분에!

넉넉한 그늘이었던, 노숙을 자처했던, 딱 한 평에서만 꼿꼿했던 나무의 뿌리가 말라갑니다. “보호자 서명란에/ 또박또박 눌러쓴 당신의 이름 석 자”의 잉크처럼요. 마냥 힘들게만 살았던 삶도 아니었지만, 세상 밖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나고 보낼 순간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세월이라는 열차에 탑승한 우리는 순식간에 지나쳐버리는 풍경이며 바람입니다. 여섯 수의 시조로 넘길 수도 있을 만큼요. 이렇듯 사는 일 별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만 하고 살았을까요? 너무 희생만 하고 살았을까요? “지지고 볶던 일이” 이제야 “왜 이리 서러울까”요? 먼저 갈 슬픔 대신 남아 있을 감사를 껴안으며 “보호자란에 내 이름을 적는” 오늘부터 화자는 공손에 공손을 더하고 그늘에 그늘을 더할 느티나무가 되어야겠지요.

자연의 풍요와 조상님의 은덕을 생각해 볼 추석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사르르 행복이 터지는 마법처럼, 밑줄 치고 싶은 각별한 명절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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