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와 그림이 작품 속에 오롯이 녹아든 문인화의 길을 걷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본인만의 서체와 그림, 그리고 한시의 세계 구축

시인도 등단, 시집 ‘세 그루 밀원’ 우수도서 선정

 

삽화 그림은 초등 2학년 1학기 교과서에 개재

옻칠 그림 몰입, 새로운 동양화 영역 개척 중

이육사문학관 개인전 방문객과 함께(2022년)
이육사문학관 개인전 방문객과 함께(2022년)

시서화(詩書畵)는 선비의 기본 덕목이었다. 지금 시대 우리나라에 시서화를 모두 하는 사람은 매우 희귀하다. 시서화를 모두 다 하며 주목받는 애향인이 있다. 대영중학교와 영주중앙고를 나온 울산대 이상열 객원교수가 그다.

페이스북에는 그가 그린 동양화에 어울리는 한시가 자신만의 필체로 쓰여있다. 한시의 작가가 누군지 검색해도 없다. 다른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그가 지은 한시였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풍경화나 추상화가 아니라 한시를 읊으면서 나온 것이었다. 스스로 시인이라 칭하지 않으나 그는 엄연히 정식 등단한 시인이다.

스스로는 부끄럽다 하나 시서화가 한 작품에서 조화를 이루는 작가이다. 2000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동양화 중 문인화를 꾸준히 내는 그는 울산대 출강을 하며 부인도 미술학과 교수로 서로 자극을 주고 격려를 하는 가정을 이루고 있다. 그와 어릴 때의 추억담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많지요? 지금 생각나는 추억이 무엇인가요?

내성천 모래 위에서 많이 놀았습니다. 장마철이 아니면 내성천은 모래밭이었습니다. 나중에 잠실 아파트 짓는다고 그 많던 모래를 마구 퍼갔습니다. 문단역 옆에는 싣고 가기 위해 쌓아 놓은 모래가 산을 이룰 정도였습니다.

내성천 옆에서 사셨군요?

내성천이 흐르는 문단에서 태어나 도촌초등학교를 나와 영주 대영중학교에 진학하며 기차로 통학했습니다. 통학하는 대영중학생들이 전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자발적 공부라기 보다 학교에서 심어 놓은 감시자 ‘통학부장’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통학부장’도 학생이었습니다. 통학 중 공부하지 않으면 토요일 오후에 운동장에서 토끼뜀을 뛰어야 했습니다.

면학열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고 탈선 방지 목적이었겠지만 요즘 같으면 문제시될 일이군요.

지금 생각하면 정상적이지 못하나 그때는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시간대에 통학을 하니 전부 아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가장 나이 많은 형 생일에 통학생들이 돈을 모아 선물도 했습니다. 영동선 통학생들은 경북선 통학생들과 경쟁의식도 있었습니다. 물론 경북선 통학생들도 우리에게 그런 감정을 가졌습니다. 여학생을 둘러싼 갈등도 있었고요(함께 웃음).

통학을 열차로만 하셨나요? 당시 버스도 있지 않았나요?

당시 버스는 비포장 길을 달리니 덜컹거리고 제 시간 도착출발도 드물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철도청 직원이라 가족이용권으로 철도이용은 돈이 들지 않은 이점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가족이 영주로 이사를 해서 집에서 걸어 다녔습니다. 집이 영주중학교 근처였습니다.

그 집은 부모님 돌아가시고 비워두니 집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의 추억거리만 챙기고 남에게 넘겼습니다. 마침 현재 강의를 하는 울산시와 집인 세종시, 양 도시와 비교적 가까운 문경에 지인이 빌려준 작업장을 얻었습니다.

통학열차를 둘러싼 이야기가 많겠는데 한 가지만 더 할까요?

집에 갈 때 영주역에서 일명 개구멍으로 불렀던 측백나무 사이로 기차를 먼저 탔습니다. 개구멍을 이용한 건 거리상 잇점 외에 객차 의자를 들추면 누군가가 빠뜨린 동전이 있었습니다. 그 동전으로 당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브라보콘을 사먹었지요. 통학생들이 서로 먼저 개구멍을 통과하려고 경주를...(함께 웃음).

문단에서 영주중학교 옆으로 이사를 하신 후엔 그런 짜릿함도 없어져서 아쉬웠겠는데요?

아쉬움 보단... 방과 후에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제가 이사를 조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사 후 영신당 약국 앞 적산가옥 건물 2층 화실(고 조재현씨가 운영)에 다녔습니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올라 2층 화실의 문을 열면 코끝을 파고드는 유화기름 냄새, 그 냄새가 참 좋았습니다.

유화기름 냄새가 매우 좋았군요. 하긴 저도 드물게 다니는 트럭 뒷꽁무니 매연 냄새 맡으려 달리기도 했습니다만(함께 웃음).

저도 트럭 따라 달렸는걸요. 소독약 차 따라 다니며 소독 냄새를 맡기도 했습니다. 화실에 다니면서 선배들도 만났습니다. 선배들 조언이 서로 달라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그 선배들 위해 영신당 약국 앞 우물 길어서 라면을 끓이기도 했습니다. 그 우물은 지금 사라졌습니다. 그래미미술학원 김해성 원장님(하나유치원 창업자)께 체계적으로 미술을 배웠습니다.

문인화 '우중연무'
문인화 '우중연무'

시서화를 모두 다 하시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먹으셨나요?

시서화를 다 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는 아닌데... 시인이라기에 부끄럽고 글씨는 정식으로 배우지도 못했거든요. 고등학교 재학 시 묵선회 활동을 했습니다. 묵선회는 남녀 고교생이 참가하는 서예클럽이었습니다. 윤옥식 선배, 김동진 서예가, 권기철 화가도 같이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붓글씨 쓰며 자연스레 한시도 접했습니다. 저는 시도 그림 때문에 하게 됐습니다. 당시 한시는 제게 너무 어려워 한글 시 습작을 많이 했습니다. 동양화는 화동선생님(전성진)이 중앙고 부임하시면서 먹그림 세계를 접했습니다.

한글 시 습작을 하신 내공이 쌓여 시인으로 등단을 하셨군요?

시인이라 하기엔 제가 부족하지요. 어찌어찌하다 문학저널에서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습니다. 그 뒤 써 두었던 시를 모아 첫 시집 『손톱이 아프다』를 내고 『세 그루 밀원』을 또 냈습니다. 공저 시집(수요시포럼)에 참여도 했습니다. 다른 시인의 시집에 그림으로 참여하기도 했구요.

『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란 시집에 실린 그림은 이 화백 작품이더군요. 초등2-1에 나오구요.

어떻게 아셨어요? 울산에 사는 김시민 시인의 시집에 시 마다 그림을 제가 그리긴 했습니다. 시집 『세 그루 밀원』은 지난해 우수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가문의 영광이지요.

우수도서로 선정된 시집이라니 대단합니다. 대학 시절부터 시를 쓰셨나 봅니다?

대학 입학하니 선배들이 데모하다 잡혀가고... 그런데 그들이 읽는 책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시를 접했더니 그들의 마음이 느껴지더군요. 대학 시절 시집을 많이 탐독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미대를 가셨는데..

고등학교 여름과 겨울 방학 기간 서울 입시미술학원에 가서 빡세게 배웠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입니다. 당시 영주에서는 입시미술(동양화)을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글씨체를 만드셨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한시도 직접 지으신다고 하셨는데?

한시를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조선 한시와 중국 한시를 자주 보고 감상하며 그 시에 맞는 그림도 상상합니다. 문인화는 그림에 어울리는 한시, 한시에 어울리는 그림이어야 합니다.

울산에 있다 언양으로 이사했는데 분위기가 고향과 비슷합니다. 그곳 남천이 내성천 분위기입니다. 해 뜨고 노을 질 때 한시를 지었습니다. 그곳에서 한시 약 200편을 썼습니다. 주로 칠언시입니다. 영주 집을 팔고 문경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강의 없는 시간엔 가서 사과 농사도 지으면서 지은 한시도 40편 정도 됩니다.

수백 편의 한시를 쓰셨다니 놀랍습니다.

한시는 전문가 검증을 받지 못해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시 쓰기 노력을 했다기 보다 그림 그리기 위해 한시를 썼습니다. 시상이 떠오르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시 숫자와 같은 그림도 그렸다는 것이지요. 통상 문인화라 하면 사군자를 떠올립니다만 저는 다양한 소재를 쓰고 형식에 맞추지 않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편입니다. 사군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옷칠화 작업중
옷칠화 작업중
옻칠화
옻칠화

자신만의 화풍을 무엇이라 정의하시는지요?

아직 저 다운 화풍을 정립시키지 못했습니다. 제게 그림은 인지적 관점 중심입니다. 그림에 뜻을 집어넣으려니 자꾸 더 어려워집니다. 동양 3국 중 우리나라만 먹그림이 따돌림받습니다. 저는 그 돌파구로 요즘 옻칠화를 주로 합니다.

옻칠화는 전통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한편으론 공예적 칠과 맞닿아 맥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동양화의 취약점 중의 하나가 재료입니다. 종이와 먹이 빛과 습기에 약합니다. 요즘 옻칠 그림 그리느라 때로는 꼬박 15시간을 제 자리에서 그리기만 하기도 합니다. 옻 때문에 가려워 잠을 못 자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좀 덜 가렵습니다.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의 옻칠 그림을 보고 강열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림이 물에 잠겼는데 변하지 않았습니다. 성파스님을 찾아 절에서 6개월 상주하며 옻칠 그림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스님을 가끔 찾아뵙니다. 제 칠화를 보여드리기도 하고요.

옻칠이라면 검은색인데 검은색 그림만 그리시나요?

옻칠로도 다양한 색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순수 옻과 여러 안료를 혼합하여 다양한 색을 만듭니다. 다만 옻칠의 특성상 고온다습한 여름철에만 칠화를 그리고 쉽게 말릴 수 있는지라 옻칠화 전용 건조실을 갖춘다면 사계절 작업도 가능하겠지만... 칠화로 저만의 화법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아직 제게 옻칠화는 과정 중입니다.

큰선비 행장(일대기)의 ‘죽어서야 끝났다’ 표현은 찬사입니다. 늘 과정 중이라는 말과 통합니다.

아이구 저를 선비에 비유하시면(함께 웃음). 저는 옻칠로 제 화법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선비들에게 시서화는 기본이었지만 학문을 더 중시했습니다. 시서화는 수단이었지요. 그분들의 시서화가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어도 말입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이상열 교수 프로필

- 도촌초등학교, 대영중학교, 영주 중앙고등학교

-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영남대 교육대학원

- (현) 영주미술작가회, 울산민미협, 울산대학교 객원교수

- (개인전) 31회

- (단체전) 500여회 출품

- (저서) 그림 엽서집 『랄랄라 라다크』, 시집 『손톱이 아프다』, 시집 『세 그루 밀원』

- 공저·시집 『피타고라스의 맨발』,『부의』, 『봄은 몇 층입니까』, 『롤랭의 가방』 등

- 삽화-『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 글 김 시민/그림 이상열(초등 교과서에 나옴)

          『콩알 밤이 스물 세 개』 글 남은우/그림 이상열,

          『얼룩진 금박댕기』 글 김영주/그림 이상열 등

- (수상) 문학저널 신인상(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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