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
안개가 익어간다 -박명숙
자욱이 돋아나는 안개를 긁어대느라
마을은 아침부터 젖은 몸이 가렵다
고샅길 깊은 목덜미도 비릿하게 벗겨진다
가르마를 탈 수 없는 숱 많은 머리칼처럼
무성한 얼룩으로 번져가는 덤불처럼
안개가 무르익은 손길로 마을을 풀어헤친다
-안개라는 해독제
안갯속에서는 모든 게 애매하게 느껴집니다. 늘 당연했던 사물의 모습조차 희미한 형체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인데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사랑이 아닌데 사랑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안개는, 아쉬운 것들의 숨김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뚜렷했던 생각을 망설이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개는 위태로운 교차점일 수도 있고, 생명의 고리도 짧습니다.
다만 안개도 걷히기만 하면, 사물을 더욱 선명해지게 하는 속성 덕분에 분열된 세계의 해독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합니다. 심상을 앉힌 주관적 묘사로 빚어 다양한 해석을 던져 주지만,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은 이 시조처럼요.
간절한 햇살 한 줌을 얻기 위해 밤새 깃들었던 절망의 내력을 지우듯이, 느린 걸음의 “안개가 익어”갑니다. 생각의 한계를 느끼기 전에, 안갯속을 정처 없이 방황하기 전에 “마을을 풀어헤”칩니다. 마음도 풀어헤칩니다. 그렇게 아득했던 생각의 통제선을 걷어 줍니다. 안개는 비로소 한가해집니다.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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