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덩어리만이 아니었다. 깨진 돌, 녹슨 못, 구리 뭉치도 삶의 여정이 있었다

작품 흙과 물
작품 흙과 물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여러 국가에서 기존과 다른 작품 세계 선보이며 ‘주목’

사물의 삶을 보여주며 사람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

모친 병환 들자 고향 돌아와 봉양하며 아픈 동생도 돌봐

고향 영주, 예술문화가 스며들 수 있는 쪽으로 변화했으면

 

지난 3월 17일 - 4월 7일 열렸던 '안시형 작가' 전시회 포스터 
지난 3월 17일 - 4월 7일 열렸던 '안시형 작가' 전시회 포스터 

올해 영주 갤러리 즈음에서 충격적 작품을 보았다. 바로 안시형 작가의 ‘먼저덩어리’였다.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 뭉쳐진 먼지덩어리가 작품으로 관람객을 대하고 있었다. 사람에 의해 방안으로 옮겨졌다가 진공청소기 통해 다른 먼지와 뭉쳐져 세상에 나온 스토리가 들어있는 먼지덩어리. 먼지덩어리만이 아니었다. 깨진 돌, 녹슨 못, 구리 뭉치도 각자의 삶의 여정이 있었다. 안시형 작가는 관람객을 위해 설명도 붙여 놓았다. 그 설명은 해설이라기엔 시적 감흥을 갖고 있었다. 전통의 심미적 관점이 아닌 작품에 사용된 사물에 깃든 이야기가 관람객에게 사람의 사물의 삶에 대해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요즘 고향인 영주에 와 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기 때문이란다. 효를 중시하는 선비의 고장 영주 사람이다. 어머니는 그가 미술 작가로 커나가는데 큰 버팀목이기도 했다. 어렸을 적 어려운 형편에도 그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구를 구해 주었다.

못의 삶을 간직한 작품

요즘도 영주에 기거하시나요?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하셨는데 좋아지셨는지요?

네. 지난 해 말, 어머니가 편찮으신 후 영주시 이산면에 와 기거하고 있습니다. 반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가 건강을 많이 회복하신 편입니다. 그래도 좀 불안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자식들 걱정에 고생하셨습니다. 아버지는 20년 전에 타계하셨으니 더욱 심리적인 부담도 컸을 겁니다.

어머니 병 구환하러 어머니와 함께 지내시다니 효자이십니다. 다른 형제들도 있을텐데...

다른 형제들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지 마음은 모두 저와 같을 겁니다. 동생 하나는 병원 신세를 오랫동안 지고 있으며 두 살 위 형이 있으나 10여 년 전에 행방불명입니다. 막내 여동생이 가끔 영주에 와서 어머니 반찬을 만들어 놓습니다. 어머니는 병환 중에도 자식들 걱정을 하십니다. 제가 어려서 그림에 빠질 때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으셨지만 어머니는 응원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전문가용 이젤, 화구박스, 팔레트를 구해 주셨습니다.

중학교 때 그림 도구를 제대로 갖추셨군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빠지셨군요?

저는 예천 서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5살 때 영주 가흥동으로 부모님 따라 이사했습니다. 영주 남부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부 활동을 했습니다. 초등 6학년 때 이유홍 선생님께 방과 전 붓글씨, 방과 후 그림을 배웠습니다. 대영중학교 미술부 때는 김종한 선생님과 야외 스케치도 다녔습니다. 영주 중앙고 미술부 활동을 할 땐 전성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흥동에 사셨으면 서천에서 많이 놀이를 했겠는데요?(함께 웃음)

그럼요. 마애삼존불상 근처에서부터 삼판서고택이 있는 구성공원까지의 서천이 주 놀이터였습니다. 물놀이도 하고 피라미도 잡고...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했구요(함께 웃음)

안시형 작가
안시형 작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대학은 조각 쪽으로 전공하셨네요?

미술대학 진학에 연속 실패했습니다. 좋아하던 미술에도 회의를 느꼈습니다. 붓 잡기도 싫었습니다. 그림을 그려도 완성 후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군 입대가 도피처이기도 했습니다. 군 제대 후 조각으로 진로를 바꾸어 대학 진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통조각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미술대학을 다니며 그림과 조각을 멀리하며 방황을 오래 했습니다.

현재 안작가가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걸 보면 방황이 창의성 발휘 등 새로운 시도를 이끌기도 하나 봅니다.

저의 창의성 부분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의 간절함으로 생겨난 것 같습니다. 몇 번의 미대 진학 실패, 좋아했던 미술에 대한 회의, 전통 조각에 대한 기피 등에 따른 방황이 새로운 모색의 간절함을 낳기도 했습니다. 방황은 새로운 삶을 향한 몸부림이란 생각도 합니다. 생동감 있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에 눈길이 닿았을 때 창의성도 생기지 않나 생각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에서 창의성도 출발한다고 봅니다.

작품 중 사용 후 폐기된 못을 모아 놓은 작품을 보았습니다. 통상적으로 쓸모없어진 건축 재료라고 생각할 겁니다만...

화목 보일러 땔감으로 공사장 폐목을 썼습니다. 모아둔 재속에는 휘어진 못이 많았습니다. 그 못들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서슬 퍼런 강철의 날카로움, 망치에 얻어맞으며 나무 깊숙이 파고들어 나무를 잡고 있는 힘, 사용 후 뽑혀 휘어져 버려지고 불 속에 다시 던져진 모습, 강인함은 간 데 없고 연약하게 휘어진 허리... 저는 못의 허리를 펴주고 싶었습니다. 못만 전시한다면 관람객은 해석이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서 못의 삶에 대한 글을 함께 붙였습니다.

깨진 돌을 갈아서 다시 강으로 돌려보내셨다 들었는데 왜 그러셨나요?

방황의 시기, 강가에서 깨진 돌을 보았습니다. 깨진 돌의 날카로운 면이 저의 상처받은 마음과 같았습니다. 돌을 작업장으로 가져와 날카로운 곳을 둥글게 갈아서 다시 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물속에 돌을 넣으니 돌은 물을 만나 본연의 색을 잘 드러내더군요. 그게 바로 제가 바라던 바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작품을 보면, 시간 흐름의 응축과 그 시간 흐름 속에 작용하는 노력 행동이 포함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만드는 이유가 있는지요?

삶 속에서의 시간과 경험이 많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물과의 인연, 함께 한 시간, 경험... 사물과 인간의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된 것과는 다른 각도로 보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애틋한 사물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사물 혹은 쓰레기일 뿐입니다.

옛 전위적 작가들이 감상자에게 불친절(?)했다면 안작가는 해설도 붙이시는 등 감상자 친화적 느낌도 듭니다. 그런 이유는 무엇인지요?

사물의 사연을 기록하며 저와의 사연, 사람과 사물과의 사연으로 사물의 삶 이야기를 보려 했습니다. 대량생산된 사물은 사용 과정에서 각자의 다른 사연을 갖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같은 사물이지만 다른 사물입니다. 간혹 주변에서 사연이 있는 사물을 작품 하라며 전해주며 사연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작품이 옛 전위적 작가들에게 딴지 거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 이유가 있는지요?

예술가의 생명은 저항정신입니다. 사고의 전환,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꾸며 알아갑니다. 자신의 손재주를 뽐내고 욕망을 발산하는 것이 예술이 아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며 기존의 예술에 혁신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술은 낯섦과 때론 충격과 알 수 없는 난해함이 동반됩니다.

다른 작가들이 하지 않는 전위적 작품이 많은데 그 길을 가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그림 그리고 인체를 조각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방황하다 치열한 일상의 삶과 고귀한 예술 세계의 격차를 보고 느끼며 삶과 예술이 함께 할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사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변화는 끊임없이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2000년 부산에서 첫 개인전, 동의대 출강, 2003년 경남도립미술관 조각공원조성사업 운영위원장도 하고, 부산비엔날레 조각 프로젝트 참여, 여러 차례 개인전을 하는 등 부산·경남 지역과 그 외 지역에서도 활동하셨습니다. 고향과 관련된 활동도 하셨지요?

외지에 가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게 사람입니다. 그린화실 권경희 선생님, 송재진 관장님,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친구들, 미술부 선.후배들과 삶과 예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2002년부터 영주미술작가회의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영주미술작가회’ 정기전에 출품하고 있으며 고향의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낍니다.

영주에서의 작품 활동도 더욱 기대합니다. 안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전국, 더 나아가 세계 사람들이 영주를 찾으면 더욱 좋겠군요. 노르웨이 등 외국에서 이미 전시회도 하셨지요?

노르웨이는 2016년 베스트포센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했습니다. 약 6개월간의 전시였습니다. 그 외 몇 나라에서도 제 작품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영주에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합니다. 일도 병행해야 하는지라 일할 곳을 찾고 있기도 합니다.

예술가의 관점에서 고향 영주가 어떻게 변화를 추구했으면 좋을까요? 물론 좋은 쪽으로의 변화입니다(함께 웃음).

고향 영주는 타 지역 처럼 경쟁하듯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예술문화가 스며들 수 있는 쪽으로 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가들이 많은 연구를 토대로 방안을 강구하시리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 사회에서 심신이 치쳐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쉴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 의미 있는 삶인가를 느낄 수 있는 곳, 영주는 잃어버린 시간과 행복을 찾는 곳, 인문과 예술을 통해 작은 것에서 확대해 가야한다 생각합니다. 독일의 예술가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며 ‘사회 조각’이라는 확장된 예술 개념을 통해 사회의 치유와 변화를 꿈꾸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술가입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안시형 작가 프로필

- 영주남부초등학교, 대영중학교,

- 영주중앙고등학교

- 동의대학교 미술학과(조소전공),

- 영남대 조형대학원 조소과 졸업

 

- 개인전

2000년 이후 지금까지 부산, 경남,

서울, 경북에서 개인전 다수 개최

국내외 단체전 다수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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